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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로 전파된 장안 문화
그들이 상징했던 개방성은 무엇이었을까
동아시아로 전파된 장안 문화
그들이 상징했던 개방성은 무엇이었을까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6.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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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11. 신라인이 장안에서 배운 세계: 의상과 그의 스승 지엄


▲ 의상스님 진영. 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에서 소장하고 있다. 고잔지는 원효와 의상을 화엄종 조사로 숭앙하고, 두 스님의 일대기를 두루마리 그림으로 묘사했던 묘에(明惠)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이들 일파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를 단순히 사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일상적 삶의 실천에 얼마나 불교적일 수 있는가가 이들의 큰 관심사였다. 다만 지엄도, 지엄의 스승이었던 두순도, 지엄의 제자였던 의상도 정치적인 출세에는 그리 관심이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644년, 당은 언기국과 구자국을 정복함으로써 서역에 대한 서돌궐의 영향력을 거의 완전하게 배제하게 된다. 이 정벌을 계기로 당은 서역 여러 나라들은 물론 서역의 통상로를 완전히 지배하게 됐고, 당은 이제 중원은 물론 서북의 이민족 국가들을 함께 아우른 제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것은 당의 안전에 가장 직접적인 위협이었던 서돌궐이라는 세력에 대한 우려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동시에 서북의 전진기지이자 마지막 방어선이기도 했던 장안의 안전도 역시 확보됐다는 의미다. 대신 안서도호부가 장안을 대신해 전진기지와 방어거점의 역할을 떠맡았다. 사실 강남과 강북을 아우르는 것만으로도 중국의 통일왕조가 갖는 정치, 사회, 군사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그런데 서쪽과 북쪽의 이민족을 물리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복속시킨 통일왕조, 게다가 서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중국 왕조의 출현은 장안 동쪽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정도를 떠나 직접적인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당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에 적극 참여하거나 아니면 맞서 싸우는 갈림길에 당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 제국의 행보에 제국의 동쪽에서 角逐했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가 외교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굳이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羅唐과 麗濟가 서로 동맹을 맺고 대응했으며, 결국은 나당 연합이 승리하면서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고, 다시 나당 간의 전쟁 끝에 신라가 당 제국을 한반도에서 축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적 각축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650년대 말미에 이르러서였고, 당이 서역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 직후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의 삼국은 급격하게 강성해진 당과 성급하게 맞서는 게 패착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리적인 충돌은 되도록 피하고 현상을 유지하면서 기회를 본다. 이 정도가 가장 기본적인 책략이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 같은 경우는 직접적으로 접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이 제국의 입지를 다지지 못하도록 외교 군사적으로 다양한 견제책을 시행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태종의 전격적인 서역 정벌은 그러한 방책을 무효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응의 방향을 새롭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반면 신라는 내심 환호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를 밀어내고, 다시 백제의 뒤를 쳐서 한강 유역을 장악한 뒤로 꽤 오랜 시간을 버텨낸 신라였다. 물론 오로지 신라의 힘만으로 한강유역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양쪽에서 압박하는 힘은 신라 혼자로서 감당하기에 쉽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라는 기민한 바가 있었다. 중원을 차지한 수와 당 같은 국가를 적절히 그리고 적극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안간힘을 써서 지킨 것은 한강 유역이 아니었다.
중원을 통일한 왕조인 隋 그리고 唐과의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통로였다. 그리고 서역 지배를 공고히 한 당이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시선에 들어온 것 역시 직접 접경하고 있는 고구려의 등 뒤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신라였다. 멀리 있으면서 가까이 있는 적의 등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나라, 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의 적은 아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아군이 적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적의 적은 적어도 당장은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우호적인 적이기도 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데 가장 소극적인 국가였다. 불교의 공인이 고구려나 백제보다 100년 이상 늦었던 것 역시 단순히 지리적인 입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진흥왕 때인 553년이다. 이를 두고 나제동맹에 대한 배신이니 뭐니 하지만, 이것은 후대의 시각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나제동맹은 맺어진 적이 없었고, 그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서로 일시적인 군사적·외교적 협력관계가 간간히 유지되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민족’이라는 의식 역시 없었던 시대이다. 각축하고 경쟁하는 국가 사이에 배신을 말하는 것이 더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사료에 의하면 백제 역시 쉴 틈 없이 신라의 배후를 노렸다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신라가 왜 한강 유역에 그렇게 공을 들였느냐가 될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6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가까운 기간 한강 유역만은 무조건적으로 지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결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왕조와 통교할 수 있는 거점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얻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와의 각추에서도 그것은 대단히 유리한 점이었지만, 중국 왕조와의 통로를 유지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라로서는 선택의 여지를 늘리는, 다시 말하면 국가의 숨통을 틔워놓는 이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다른 선택을 피해갈 수 있는 이 하나만으로도 신라로서는 한강유역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한 후의 신라는 불교를 앞세운 국가정책을 시행하는 데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신라 사람들의 佛心이 대단해서였다고 말하면 그 역시 오산이다. 신라의 적극적인 불교 옹호와 활용은 이 한강 유역을 통한 중국 왕조와의 교류에 그것이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누누이 말해왔지만, 남북조는 물론 수·당의 두 왕조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국가정책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불교국가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신라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중국 왕조와의 지리적 통로가 한강유역이었다면, 정치적 통로는 불교였던 셈이다.


수나라가 등장하면서 신라의 불교 활용 정책은 좀 더 굳건해지게 된다. 그 첫 번째 자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圓光이다. 화랑도에게 세속오계를 준 인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신라의 대중국 정책의 핵심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원광은 수나라와 신라 간의 국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할 정도였다. 아마도 여기에는 원광이 귀국하기 이전 장안에 머물 때 수나라의 대소관료는 물론 장안 불교계의 고승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원광은 수 문제가 불교를 정치에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수나라 장안 땅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신라가 굳이 문제에게 청하면서까지 원광의 귀국을 재촉했던 이유가 단순히 불교의 진흥을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외면한 생각일 것이다.

▲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 그리고 무량수전.이.무량수전은 탁트인 개방적 공간을 세속의 나그네들에게 제공해준다.

불교를 통한 신라의 대중국 외교전 혹은 정책에 있어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慈藏(590?~658?)이다. 자장은 당 태종이 서돌궐을 서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던 시기에 장안으로 유학했던 승려다. 자장이 장안에 머물 때 당 태종은 자장을 직접 만나보는 것은 물론 적잖은 배려까지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자장은 장안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신라 왕실의 국가정책에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신라 관료들의 복식을 당의 그것으로 바꾼 것이다. 신라 왕실이 자장을 필두로 황룡사 장육존상과 구층탑을 조성하는 등의 불교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동시에 관제를 당의 체제를 모방해 재정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라 왕실이 시행한 불교정책의 핵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원효(617~686) 그리고 의상(625~702)은 그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성장한 승려들이었다. 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했을 때, 장안에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 태종이 개척한 서역의 통상로를 거쳐 현장이라고 하는 승려가 장안으로 귀국했던 것이다. 그는 방대한 분량의 불교전적들을 가지고 와서 번역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신라에 살던 청년 승려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불교 분위기가 가득 찬 경주에 장안의 새로운 불교를 가져와서 전한다는. 잘 알려진 것처럼, 원효와 의상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입당유학을 시도한다. 첫 번째는 고구려를 거치는 육로를 택했는데, 고구려 병사들에게 붙잡히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650년의 일이다. 두 번째는 당항성을 거쳐 당으로 들어가는 해로를 택했는데, 중간에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만 장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던 660년 말의 일이다.


그런데 막상 장안에 도착한 의상은 유학생활의 스승으로 현장을 택하지 않았다. 전혀 엉뚱하게도 智儼(602~668)이라는 인물을 스승으로 택했던 것이다. 그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상적인 선택이 아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의상이 지엄을 찾아갔을 때, 지엄은 종남산 일대에서 보여 준 활약으로 말미암아 장안성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인물이었다. 화엄사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 그러면서 인도불교와는 다른 전혀 중국적인 불교 영역을 개척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의 불교가 인도불교의 이식이었다면, 지엄에게 이어진 불교전통은 530년대 北魏에서 시작돼 불교 중국화의 길을 꾸준하게 모색해왔던 불교였다. 이른바 지론학파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앞서 이야기한 삼계교의 신행 역시 이 일파와 무관하지 않다. 지엄 역시 그 삼계교의 탑원이었던 백탑사 바로 뒤의 계곡에 있었던 지론학파의 사찰인 지상사라는 절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의상이 지엄에게 배운 것도 바로 이 종남산에 있는 지상사였다.
이들 일파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를 단순히 사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일상적인 삶의 실천에 얼마나 불교적일 수 있는가가 이들의 큰 관심사였다. 다만 지엄도, 지엄의 스승이었던 두순도, 그리고 지엄의 제자였던 의상도 정치적인 출세에는 그리 관심이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은 그런 일파 속에서 화엄사상을 배우게 되는데, 스승인 지엄에게서 그 배움이 충분하다고 인정받은 것이 668년 7월 15일, 지엄이 죽기 석 달 전이었다. 지엄이 죽은 후 스승의 장례를 치른 의상이 장안을 떠나 귀국길에 나선 것은 770년 말이었으니까, 의상이 장안에서 유학생활을 한 것은 약 10년 정도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지엄이 의상을 제자로 받아들인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의상이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의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는 중국까지 덮었다. 나무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치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 청소를 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바로 도착했다. 극진한 예절로 그를 맞이하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어제 꾼 꿈은 그대가 내게로 올 징조였구나.’


방으로 들어올 것을 허락했다. 의상이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그윽하고 미묘한 데까지 해석하니, 지엄은 학문을 서로 이야기할 동반자를 만나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三國遺事』 「義相傳敎」) 의상의 뛰어남과 함께, 그의 사상이 해동에 가득 퍼질 것임을 예언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후대에 더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신라 지역에서 자란 나무가 중국을 뒤덮고, 다시 그 나무에 놓인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친다는 내용은, 장안에 와서 새로운 불교를 배운 의상에 의해 그 새로운 불교가 해동에까지 널리 퍼질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7세기 중후반 인도와 서역에서 들어와 장안에서 꽃을 피운 문화가 어떻게 다시 동아시아 각 나라로 전파됐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안은, 당 태종으로부터 측천무후에 이르기까지 장안은 서역의 문물이 들어와 중국의 전통문화와 융합되고 성숙하는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장안에 인질로 끌려온 주변 각 나라의 사람들이, 그리고 장안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문물을 배우고자 유학을 온 유학생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장안의 문물을 배워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장안에 전하는 전파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융화의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성장한 장안의 문화가 다시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간다.
의상과 그의 스승 지엄의 이야기는, 그런 시대의 장안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에 이른다고 말한다. 문화 곧 한국적 사유전통의 저변 자체가 불교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한국불교의 사유전통에서 기반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원효와 의상이다.


유학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장안의 문화를 주변부에서 관조해 독창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던 원효와, 그 현장 속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장안불교문화의 핵심적 사유를 해동의 새로운 전통으로 정착시켜 낼 수 있었던 의상, 이 두 사람은 어느 쪽이든 극성기 장안 문화의 혜택을 받았던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상의 스승인 지엄, 그는 당 제국 그리고 장안도성의 사람들이 지향했던 개방성을 상징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약 1세기 반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의 일이 일본에서도 일어난다. 그 주역은 일본에서는 傳敎大師로 불리는 사이쵸(最澄, 767~822)와 弘法大師로 불리는 쿠카이(空海, 744~835)이다. 이 두 사람 역시 장안의 불교를 가져와서 일본 불교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호칭이 傳敎와 弘法으로 붙여진 것도 장안유학이라는 그들의 이러한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받아들이고 전한 것이 불교이기만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받아들이고 전한 것은 불교였지만, 그 이면에는 개방적인 장안 사람들의 사유방식, 그들의 異文化에 대한 포용성 역시 그 안에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8세기의 경주와 9세기의 교토가 장안의 뒤를 이어 국제화됐던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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