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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대장’ 통해 신분 상승과 사회적 변화 짚어냈지만 …
‘호적대장’ 통해 신분 상승과 사회적 변화 짚어냈지만 …
  • 교수신문
  • 승인 2015.04.2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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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_ 푸른역사아카데미 집단서평회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권내현 지음, 역사비평사, 2014)

▲ 저자 권내현 교수와 역사학자, 사회학자가 함께 책의 의미와 성취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진제공=푸른역사아카데미

특히 노비 가문을 6대나 추적한 것은한국사에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의 결론에 앞서 이 자체로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화와 발전에 대한 해석에는 아쉬움을 느낀다.


권내현 고려대 교수(역사교육과)가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역사비평사 刊)을 출간한 것은 지난해 9월이었다. 17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조선에서 양반이 되려고 했던 ‘김수봉’이라는 어느 노비 집안의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한 책이다. 그렇다면 조선후기 사회경제사를 전공한 교수가 의외의 책을 낸 것일까. 이 책은 저자의 내공이 묻어나는 조선후기 호적대장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의외’라고는 할 수 없다.
권 교수는 노비들이 살았던 당대의 ‘호적대장’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꿈꾼 그들의 현실과 실상을 밝혔고, 아울러 조선시대 하천민들의 신분 성장사까지 포괄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호적대장’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의 평범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방대하게 기록된 중요한 자료다. 사회경제사 연구의 기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전공 한우물을 파면서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교양서를 집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더구나 미시사와 일상사, 인물사 연구에까지 참고할 수 있는 접근을 보였다.


푸른역사아카데미 집단서평회가 이 책에 시선을 돌린 것은 쉬 이해된다. 지난 3월 20일(금) 정수복 박사의 사회로 저자 권내현 교수, 패널 박종기 국민대 교수(국사학과)·계승범 서강대 교수(사학과)·김봉석 성균관대 강사(사회학)가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289 JNJ 빌딩 3층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권내현: 단성과 언양 호적대장이 꽤 긴 시간 남아 있는 호적이기에 조선시대 연구자들에게 많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자료다. 나는 호적을 통해 하천민 가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호적에는 하천민에 관한 정보가 방대하다. 그래서 하천민의 결혼, 이주와 정착, 사회적 성장에 관해 장기적인 추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1717년 어영청 보인 김흥발의 가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김흥발이나 부인이 평민인데 부인의 외조가 사노비이며, 일반인 평민 가계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여기서 역추적을 하다 보니 김흥발의 아버지인 김수봉이 눈길을 끌었다. 그가 1678년 사노비였으며, 그의 일가가 17세기 후반에 면천함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수봉과 흥발 등 호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수평적으로 추적하자 그들 친인척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수직적으로 추적하자 후손들의 장기적 성장과 쇠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수봉가가 어떻게 직역 상승을 꾀했는지를 면밀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전통 양반층과의 통혼이 불가능했고, 아래로부터 성장한 이들을 인정 않는 양반층의 폐쇄성이 있어, 동성촌락 형성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양반화를 추구한 하천민이 넘을 수 없었던 장벽인 학문과 교육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이들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정수복: 단순한 역사학자의 책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역사에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저작인듯하다.

“노비 가문 6대 추적은 한국사 최초 성과”
박종기: 조선후기의 신분변동이라는 주제는 내재적 발전론과 함께 연구됐다. 단성호적을 통해 1608~1880년 약 삼백년간의 호적을 추적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고 특히 노비 가문을 6대나 추적한 것은 한국사에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의 결론에 앞서 이 자체로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연구를 대중화 시키는 것은 또한 어려운 점인데 대중화에도 성공했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미시사에 가깝다. 이주, 상속, 정착, 입양, 호칭 등 미시사이지만(미시사와 거시사를 구분해서는 안 되지만) 역시 거시적인 작업이 좀 들어가야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변화와 발전에 대한 해석에 아쉬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책에서 다루고 있듯 1678~1717년 사이에 가장 큰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이 시기에 왜 노비에서 평민으로 바뀔 수 있었는지 詳論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수봉의 가계를 짚어가며 幼學이 된 것을 두고 ‘양반이 됐다’고 분석했는데, 반상제·양천제 논의를 참고하면 ‘유학이 곧 양반’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은가. 책에서 양반이라는 개념이 너무 폭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본관과 성씨를 획득했다, 유학이라는 호칭을 가졌다는 점으로 양반으로 칭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든다.


계승범: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준 자료 활용과 방법론을 보면,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스스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예속민이자 소외 계층인 노비 집안의 삶일지라도 얼마든지 재구성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지나치게 지배층 중심으로 소개돼온 한국사의 균형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단성호적』은 정말이지 하천민의 삶을 미시사로 연구하기 좋은 자료다. 예전에는 통계 처리하는 방법론과 직역을 따지는 방법론이 유행했다면, 1990년대 이후로는 호적대장을 통해 하층민 집안의 개인이나 가계를 추적하는 미시사적 방법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저자도 이 책에서 이런 방법론을 쓰셨다. 그렇다면 『단성호적』과 같이 이미 DB로 구축돼 있는 호적대장 자료를 활용하는 차세대 방법론으로는 어떤 것들이 유용하거나 가능할까.


권내현: 호적대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다. 신분사 연구는 많은 부분들이 축적돼 왔다. 호적대장을 기본적인 부세(세금) 장부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고, 유럽의 교부장부를 한국의 역사 연구와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유럽 학자들이 한국 전통시대의 호적을 보고 많이들 놀란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너무 개인에 관한 기록이 적고 국가가 필요한 부분만 기록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수명이나 결혼 문제 등을 연구하기에 좋은 통계 자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이 모여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양반화 과정과 구별짓기 … 정의·인권 의식도 짚어야
김봉석: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상승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경제력이 갖춰진 과정이 생략된 점이 아쉽다. 사회학의 관점에서 평등과 불평등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이고 공정과 불공정은 객관적 기준이 없는 것이다. 김수봉에게 재력이 있었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도 있고, 그냥 노비로 살기로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하고 참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불공정에 대해 생각했기에 속가 등을 통해 노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를 정의(justice)에 대한 인식이 차차 시작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지점은 5대, 6대손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이동한 곳에 양반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는데, 내가 노비였다는 것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이 그곳 사람들과 나의 ‘구별짓기’를 시도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수복: 조선후기에 농민반란이나 인권에 대한 의식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양반이 되고자 하는 주체와 체제 자체에 질문을 던진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인가.
권내현: 17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인 성장을 추구했다. 19세기에도 그런 추세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으나 더 이상 기존 체제를 견뎌내기 어려웠고, 개인적인 성장으로는 극복이 어렵다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가 농민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방관과 국가가 나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홍경래난은 터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됐다. 이 반란에는 지방 양반들도 참여하는데 이는 관직에 나가더라도 남인 출신은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는 여러 문제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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