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9:45 (토)
覆面敎王 김 교수 분투기
覆面敎王 김 교수 분투기
  • 맹문재 안양대ㆍ국문학
  • 승인 2015.04.23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 꽁트: 구조조정을 살아가는 교수들의 초상

김 교수는 머리도 식힐 겸 문구도 구입할 겸 학교 근처의 문구점에 들어갔다. 일요일이어서 손님이 아무도 없었고 주인아주머니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김 교수는 적당한 인사라고 생각했다. 몇 번 들른 집이어서 낯설지는 않았지만 김 교수의 신분을 알지 못하기에 표준적인 인사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 교수는 A4 용지한 묶음과 형광펜 세 개와 포스트잇 한 세트를 고른 뒤 계산하려고 지갑을 꺼내다가 망설였다. 법인카드를 쓸까? 아니면 개인신용카드를 쓸까? 순간 고민하다가 신용카드를 꺼냈다. “ 아주머니, 증언해줄 수 있으세요?”김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무슨 증언을요?” 뜻밖의 부탁에 주인아주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말해본 거예요.” 김 교수는 얼버무리며 매듭을 지었지만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의 한 포털 뉴스에서 연구 비리 교수의 사례를 보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연구비 법인 카드를 쓴 사례도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연구비 법인 카드를 쓴 일이 왜 잘못일까? 휴일에는 연구를 하지 말라는 것인가? 김 교수는 그 뉴스를 보면서 반감이 들었다. 연구비 법인 카드를 어떤 용도로 썼는가가 중요하지 어떤 요일에 썼는가가 왜 문제가 되는가? 그리하여 김 교수는 자신은 일요일에 연구를 하러 왔으니 연구비 법인 카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만약 문제가 되면 주인아주머니가 증언을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계산을 끝내고 커피숍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어서오세요.” 카운터의 아가씨 역시 표준적인 인사를 했다. 창가에 젊은이들 몇 쌍이 있을 뿐 손님이 적었다. 무슨 차를 주문할까?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옆쪽의 벽을 보니 텔레비전에서 노래 경연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물어보니「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는데, 특히 출연자가 독특한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노래를 부른 뒤 청중들로부터 평가를 받아 진출하는 토너먼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고 아가씨는 덧붙였다.

녹차를 한 잔 시키고 텔레비전을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오직 가창력만으로 청중의 평가를 받는다?……. 출연자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아싸 암사자’, ‘집나온 호랑나비’, ‘날아라 황금 로커’ 등으로 이름을 코믹하게 지은 것도, 가면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추측하는 연예인 판정단의 입담도 재미있었다. 대결에서 탈락한 출연자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는 방식이었다.

복면가왕, 복면가왕이라……. 김 교수는 자신이야말로 복면교수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 문구를 사고 계산하려다가 꺼낸 말이 생각났다. “아주머니, 증언해줄 수 있으세요?” 실제로 증언이 이뤄지려면 김 교수가 자신을 밝히고 친분을 쌓고 상황을 설명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감추고 있으니 복면 교수가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학교 근처의 헌책방에 들렀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더러 들르곤 했는데, 근래에는 강의와 학생 상담과 논문 쓰는 일에 쫓겨 들르지 못했다. 그리하여 출근하다가 생각나 찾아가본 것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책이 있지 않는가! 김 교수는 전공 서적들이 꽂혀 있는 책장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책을 발견한 것이다. 출간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헌책방에 나오다니…… 김 교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상한 기분으로 책을 꺼내 펼쳐 보았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김 교수는 공부의 신이다!’ 속표지에 쓰인 글귀였다. 세상에! 김 교수는 자신의 강의를 들은 학생의 책이 확실했기에 얼굴이 뜨거웠다. 지난 학기에 참고 도서로 소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녀석이 책을 팔았단 말인가? 책의 곳곳을 뒤졌지만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책의 본문에 메모한 글씨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답안지의 필체를 대조해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그리고 창피한 일인가? 김 교수는 마음을 바꿨다. 학생은 왜 책을 팔았을까? 나를 ‘공부의 신’이라고 했으면서…… 용돈이 궁했을까? 그 학생 모르게 다른 학생이 가져다 판 것은 아닐까? 혹시 나의 강의에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닐까? 김 교수는 자괴감이 들었다. 책이 헌책방에 나온 데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을 뽑아들고 계산하러 갔다. 제자가 팔아버린 자신의 책이 헌책방에 꽂혀 있는 치욕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책값은 5천원이었다. 책값을 지불하면서 김 교수는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저입니다”라고 주인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저 복면을 쓰고 책값을 계산한 뒤 헌책방을 나왔을 뿐이었다. 김 교수는 금요일에 복면을 쓴 일도 떠올렸다. 교수협의회의 임시 총회가 열려 참석했는데, 설문조사 요청이 있었다. 지난 학기에 시행된 신임 교원 채용의 불공정한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로 학교가 연일 시끄러웠다. 학과 구조 개혁안을 두고 대학 본부와 학과 간에 의견 차이가 컸고, 승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교수들의 불만이 높았다. 시행해오던 호봉제 임금체계를 연봉제로 바꾸려는 대학 당국의 움직임이며 논문 편수와 강의 평가를 강화한 새로운 업적 평가 규정에도 교수들은 예민해져 있었다. 교수협의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교수들의 의견을 모으고자 임시 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설문조사까지 했다. 교수협의회는 교수들의 의견을 취합해 학교 당국과 협의할 때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설문 항목은 총 20개였는데,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1. 제15대 김두환 총장의 학교 운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① 매우 만족한다 ② 만족한다 ③ 보통이다 ④ 만족하지 못한다 ⑤ 매우 만족하지 못한다

김 교수는 재단 설립자의 아들인 김두환 총장이 학교를 운영하는 방식이 독재 정권과 같다고 생각했다. 학교 운영을 하면서 규정과 절차를 지키기는커녕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힘없는 교수들에게 상명하복을 요구했다. 김 교수는 김두환 총장이 대학을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는 봉건적 태도에 실망했다. 그리하여 ‘매우 만족하지 못한다’라는 항목에 기입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 재단에 호의적인 교수가 지켜보지는 않을까, 눈치를 본 것이다. 그리하여 복면을 쓰고 기입했다.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지만 그래도 바른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김 교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이 눈에 들어와 슬슬 넘겨봤다. 그러다가 한 기사에 눈길을 멈췄다. 자신이 아는 교수들의 활동이 보도된 것이다. 한 유명 소설가의 타계 25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와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시상식을 성황리에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권위 있는 대학의 명예교수가 강연을 했고, 이름 있는 교수들이 주제 발표를 했고, 재능 있는 신진 교수들이 토론자로 나섰다. 문학상 심사위원들도 공개됐는데 모두 유명한 교수들이었다. 그 소설가의 문학관이 있는 도시의 시장이 나와 환영사를 했고,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격려사를 했다. 내년부터는 그 소설가를 기리는 국제 문학상을 제정하고 국제 학술세미나를 열 계획이라고도 했다.

김 교수가 알기로 그 소설가는 친일활동을 했고 해방 뒤에는 군사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세와 명예와 부를 누린 이였다. 그런데도 유명한 교수들이 그를 기리는 행사에 참석해 대놓고 찬미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놀라움이 들지도 않았다. 다만 뻔뻔한 교수들의 역사의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문학사가 왜곡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야말로 복면을 써야 하지 않을까? 복면을 썼다가는 아주 큰일을 꾸미겠지…….

주문한 녹차가 나왔다. 텔레비전에서는「복면가왕」프로그램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또 한 출연자가 경연에서 탈락해 가면을 벗었다.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는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탈락했지만 아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했다. 다른 분야를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꿈을 이뤘기에 비록 탈락했지만 행복하다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김 교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복면가왕을 다시 생각했다. 나도 복면을 쓰자! 복면을 쓰고 오직 실력으로 인정받자! 覆面敎王이 되자! 친일 활동을 하고 독재 정권을 옹호한 소설가를 미화하는 유명한 교수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복면을 쓰고 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권력이나 명예보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일이 교수로서의 길이라는 생각도 했다. 김 교수는 연구실에서 쓰다가 나온 논문을 떠올렸다. 찻잔을 비우고 기분 좋게 일어섰다.

맹문재 안양대ㆍ국문학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산문집『좋은 의자 하나』, 대담집『행복한시인읽기』,『 순명의시인들』, 시집『먼길을움직인다』,『 물고기에게배우다』,『 책이무거운이유』,『 사과를내밀다』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