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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에서 패한 바부르, 카불로 돌아가 북인도로 눈을 돌리다
사마르칸트에서 패한 바부르, 카불로 돌아가 북인도로 눈을 돌리다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3.2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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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35. 중앙아의 중심 도시, 돌나라(石國) 타시켄트(2) : 샤이바니와 바부르의 용쟁호투

▲ 『바부르왕傳(Baburnama』)에 그려진 무굴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의 초상화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Babur

‘힌두의 땅’ 힌두스탄의 제왕이 된 바부르가 세운 무굴제국은 이로부터 1857년 영국이 인도를 병합할 때까지 250년간 인도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된다. 증손자인 ‘세상의 제왕’ 샤자한이 죽은 왕비를 못 잊어 지은 건축학적 백미 타지마할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세상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비로소 한 사람의 생전 공과가 결정된다(丈夫蓋棺事方定).”
―晋書에 기록된 晉나라 유의(劉毅)의 말

어떤 이에 대해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위의 말은 사람은 죽은 후에야 眞價나 功過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니, 살아있는 사람의 행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경솔하게 힐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신춘맞이로 어울리는 驚句이지 싶다.
중앙아시아의 관문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시켄트에 첫발을 디딘 순간 나는 기쁨으로 놀랐다. 거리를 오가는 승용차의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 대우자동차였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럴까. 때는 한여름이었다. 타시켄트에 가기 전 체류증명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 요즘도 여전히 그런지는 모르겠다. 타시켄트에는 3대 명물이 있다고 했다. 멜론, 분수, 다리……. 더운 여름 과즙이 뚝뚝 떨어지고 설탕보다 더 단 맛이 나는 멜론은 사람을 미치도록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는 순간이나마 더위를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다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콰이강의 다리나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120여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국가 우즈베키스탄 주민들의 대부분은 혼혈이다. 혼혈의 특징은 미남미녀를 만드는 것일까. 이곳 젊은 여인들의 미끈한 다리가 바로 3대 명물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티무르 광장을 끼고 있는 젊은이의 거리(그들은 브로드웨이라고 부른다)를 오가는 타이트하고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들의 각선미는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를 모르게 했다. 가슴 뛰는 여름날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
“얼굴 생김새는 高麗와 비슷하고 변발(髮)해 등 뒤로 내려뜨렸다(面貌類高麗, 髮垂之於背).”
중국 25사 중 하나인 『南史』 「夷貊傳」 下 第69 高昌國條를 읽다가 맞닥뜨린 내용이다. 『南史』는 7세기 중반 唐나라 李延壽가 지은 총 80권으로 이뤄진 역사서로 南朝의 南宋, 齊, 梁, 陳 네 나라의 17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한편 역시 이연수가 지은 『北史』는 北朝 네 왕조의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본기 12권, 열전 88권 총 100권으로 돼 있다.


위에서의 高麗는 고구려를 말한다. 고구려와 고창국은 먼 나라다. 그런데 고구려인의 면모가 고창국(오늘날의 중국 신강성 투르판 지역)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이연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과 고창국 사람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연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고구려인의 면모 특징이 궁금하다.
뜻밖의 일이 이것만은 아니다. 역시 예기치 않은 발견이다.


“高昌國은 처음에는 감씨氏)가 주인이었는데, 그 뒤 河西王(『梁書』 「高昌傳」에는 河南王으로 돼 있다) 저거무건(沮渠茂虔)의 동생 저거무휘(沮渠無諱)가 습격해서 파괴했다. 그 왕 감상(爽)은 연연(蠕蠕)으로 달아났다. 저거무휘가 그곳을 점령해 왕을 칭했으나 1代만에 魏에게 멸망당했다. 국인들이 또 다시 麴氏를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름이 嘉였다. 북위에서 거기장군(車騎將軍) 사공공(司空公) 도독진주제군수(都督秦州諸軍事) 진주자사(秦州刺史) 금성군공(金城郡公)을 제수했다. 재위 24년 만에 죽자 시호를 昭武王이라 했다. 아들이 국자견(麴子堅)이었는데, 자견이 왕위를 계승하자 북위는 사지절(使持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과주자사(都督瓜州刺史) 서평군공(西平郡公, ‘平西郡公’의 오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고창왕(高昌王)을 제수했다. 이 나라는 옛날 거사국(車師國)이 있었던 곳으로 남으로는 河南에 접해 있고 동으로는 돈황과 가까우며, 서로는 구자(龜) 다음이며 북으로는 칙륵(勒)과 이웃해 있다.”


방랑 전사로 떠돌다 자신의 왕국을 세운 샤이바니
과거 거사국이었던 이 나라 고창국의 주민은 인도유럽어종에 속했고, 언어는 焉耆-구자어를 사용했다. 漢族과는 무관한 서역국가 고창국의 王 麴嘉가 죽은 후 그에게 부여된 시호가 소무왕이었다는 점이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月支의 西遷을 따라가는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에서 昭武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다. 월지의 본거지가 돈황과 감숙 사이, 기련산맥 일대였으며, 흉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서쪽으로 이주해 간 월지의 세력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 사이의 하중지방)에 정착해 9개의 국가를 세우고 떠나온 고향 昭武城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모두가 昭武를 姓으로 삼았다는 史實 때문이다. 그런데 고창국왕의 시호가 昭武王이라고 한다. 가야국 시조 수로왕비 허황옥의 시호는 普州太后다. 여기서 普州는 출신지 이름이다. 昭武 역시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창국의 지배세력은 서천 중 이 지역에 정착한 昭武城 출신의 월지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문학기행의 무대를 다시 중앙아시아 하중지방 즉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기자.
1468년 조부 아불 하이르 칸과 부친 샤 부다크가 세상을 뜨면서 우즈벡 울루스(the Ulus of Uzbek)가 분열 상태에 놓이기 시작할 때 후일 샤이바니 왕조의 창건자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Muhammad Shaybani Khan, 1451~1510년)이 된 아불 파스 무함마드(Abul-Fath Muhammad)는 열일곱 젊은이였다. 그는 청년시절을 이 지역 저 지역을 떠도는 방랑 전사로서 보냈다. 이미 말했다시피 그는 36세가 된 1487년이 돼서야 모굴 칸국 마흐무드 칸의 신하가 돼 그로부터 야씨시의 통치를 위임 받은 후 흩어져 있던 우즈벡 유목민들을 재규합할 수 있었다. 그가 세운 부하라 한국은 1697년까지 호라즘(오늘날의 히바 일대) 지역을 통치했다.
1500년, 샤이바니는 할아버지인 아불 하이르 칸이 그랬듯 티무르 왕조를 사마르칸드에서 쫓아냈다. 이후 그는 페르가나 출신 티무르 왕조의 지도자 바부르(무굴 제국의 창건자)에 대한 여러 차례의 군사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505년 그는 사마르칸드를 재점령하고, 1506년에는 부하라를, 1507년에는 헤라트마저 점령해 샤이바니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1508~9년 그는 북쪽의 카자흐 칸국을 공격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몽골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의 하자라족에 대한 공격도 실패했다. 1510년, 마침내 카심 칸이 이끄는 카자흐인들에게 샤이바니는 대패했다.


당시 이란(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샤 이스마일 1세는 샤이바니의 승승장구에 위협을 느껴 우즈벡인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1510년 대규모의 원정군을 이끌고 호라산의 메르브(Merv)에 체류 중이던 샤이바니를 기습했다. 당시 샤이바니는 카자흐 칸국과 하자라족에 대한 군사원정을 마치고 군대를 해산한 상태였다. 그의 신하들은 병력이 열세임을 이유로 퇴각해 지원군을 기다릴 것을 주장했으나, 그는 이를 무시했다. 우즈벡 군대는 크게 패하고 샤이바니는 전사했다. 이스마일 황제는 그의 시신을 토막 내 사파비 제국 각지에 전시하고, 두개골은 보석으로 장식해 술잔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162년 獅子王 老上單于가 이끄는 흉노군의 공격을 받고 월지의 왕이 참담하게 살해된 후 두개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졌다는 옛 기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왜들 이럴까.

▲ 무함마드 샤이바니(Muhammad Shaybani)의 초상화출처: http://en.wikipedia.org/wiki/Muhammad_Shaybani

이런 일련의 전쟁사를 들으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권력욕 내지 지배욕의 희생물이 된 민초들의 들풀 같은 삶이 안쓰러워서다. 끽소리 못하고 전쟁터로 내몰린 피지배계급의 애달픔을 누가 알고 보상할까.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도 죄 없고 힘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을 것이다.
샤이바니가 죽었을 때 우즈벡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하중지방)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샤이바니는 사마르칸드를 바부르에게서 빼앗은 뒤 바부르의 여동생 한자다 베굼(Khanzada Begum)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임이 분명한 이 혼인으로 그녀는 샤이바니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바부르가 살아서 사마르칸드를 떠나도 좋다고 샤이바니가 허락한 이유는 이 결혼동맹 때문이다. 샤이바니가 죽은 뒤 바부르는 샤 이스마일 1세에게 한자다 베굼을 석방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녀는 아들과 함께 바부르의 궁정으로 돌아왔다. 그 후 샤이바니의 왕좌는 그의 삼촌, 조카, 형제 등에게 전해졌다. 샤이바니 왕조는 1687년까지 호라즘(즉, 히바) 지역을 다스렸다.


‘호랑이’라는 뜻의 바부르(Babur)로 불린 자히르 웃 딘 무함마드 바부르(Zahir-ud-din Muhammad Babur, 1483~1530)는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과거 중국 사서에 大宛으로 기록된 페르가나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시켄트에서 동쪽으로 약 420km 가량 떨어져 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 사나이가 인도아대륙에 들어가 기존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이슬람 술탄 왕국을 세우게 된다. 이 사람 역시 풍운아였다. 몽골 바를라스 씨족(the Barlas clan)인 그는 부계로 티무르의 후손이며 모계는 칭기즈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혈통을 잇는 인물이었다. 유전적으로는 이러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후손들 역시 그러했다.


나중에 그는 ‘몽골’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무굴(혹은 무갈) 왕조를 세우게 되지만, 종족적으로는 투르크계였다. 열두 살 되는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어린 나이에 왕국을 물려받은 그에게 10년간은 시련의 시기였다. 그는 티무르 왕조 말기의 내분과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벡족의 침입으로 중앙아시아에서 향유하던 것을 포기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녀야했다.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1504년 카불을 차지하면서 부터다. 어린 나이에 힘의 열세로 달아나기는 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바부르는 28세가 된 1511년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 이스마일 1세의 도움을 받아 사마르칸트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은 상당히 취약했다. 4~5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그의 군대에서 세력이 가장 큰 집단은 이스마일 황제가 보낸 투르크멘 유목민 부대 ‘키질 바시(Kyzyl Bash)’였다. 이들은 이스마일 황제가 사파비 왕조를 건설할 때 결정적 도움을 준 일곱 부족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키질(붉은) 바시(머리)라는 뜻의 별칭은 이들이 머리에 붉은 터번을 두른데 연유한다. 중국 사서에는 赤帽回로 나타난다. 이들 외에 모굴과 차가타이 혼성 부대가 바부르의 군대를 구성했고, 바부르 휘하의 직속부대는 소수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종교적 갈등이었다. 그가 도움을 청하고 종주권을 인정한 페르시아인들 즉 키질 바시軍은 시아파였다. 반면에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주민들은 독실한 순니파였다. 이들은 바부르가 종교적 양심을 팔고 이단과 어울리는 것을 비난하며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협력을 거부했다. 이런 판에 바부르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동전을 改鑄해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런 종교적·사회적 갈등을 틈타 다시금 우즈벡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1512년 수적으로 열세인 우즈벡군이 바부르군을 이기고 바부르는 敗者가 된다.


거듭되는 도전(?)의 실패로 더 이상 미련은 두지 않기로 결심한 바부르는 사마르칸트와 페르가나 일대의 중앙아시아를 포기하고 카불로 돌아가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북인도로 눈을 돌렸다. 수차례 인도로 쳐들어가 마침내 1526년 4월 델리 북쪽 약 137km 지점의 파니파트 전투(The First Battle of Panipat)에서 그때까지 북인도를 지배하던 로디(Lodi) 왕조의 술탄 이부라힘(Ibrahim)을 물리치고 델리와 아그라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인도 침공의 명분은 과거 티무르가 인도를 점령했었고,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므로 인도를 지배할 정당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주일인 금요일에 행한 그의 설교 ‘힌두스탄의 제왕’을 시작으로 ‘힌두의 땅’ 힌두스탄의 제왕이 된 바부르가 세운 무굴제국은 이로부터 1857년 영국이 인도를 병합할 때까지 250년간 인도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된다. 그의 증손자인 ‘세상의 제왕’ 샤자한(Shah Jahan)이 죽은 왕비를 못 잊어 지은 건축학적 백미 타지마할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세상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제왕으로 죽었지만 ‘노천묘’에 묻힌 바부르
카불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바부르는 도시 곳곳에 나무를 심고 水槽를 만들어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했다. 1530년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알라의 품에 안긴 그는 평소의 바람대로 카불의 한 정원에 묻혔다. ‘바그 이 바부르(Bagh-e Babur, ‘바부르의 정원’)’가 그곳이다. 무굴제국은 물론 인도 이슬람 왕조의 여느 제왕들과는 달리 여기에 마련된 소박한 노천묘에 누워있는 바부르는 마음껏 햇볕을 쬐이고 비바람을 즐길 수 있으니 대단한 행운아다.


인간 심리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 하나. 앞서 하중지방의 지배자였던 사만왕조는 형식적으로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스왕조 칼리프의 권위에 복종하고 공물을 바치며 술탄이 아니라 아미르(Amir)라는 겸손한 타이틀에 만족했다. 아미르는 본래 ‘명령하는 자’라는 의미의 아랍어인데, 이 말은 무슬림 전체 首長을 가리키는가 하면, 때로는 원정군 총사령관, 지휘관, 정복지 지사, 총독 등을 지칭하는데도 사용됐다. 티무르는 칭기즈칸 가문의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였다. 티무르 제국 시대에는 칭기즈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은 결코 칸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칭기즈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내세우고 실질적 지배와 통치는 티무르 자신이 행했다. 그리고 ‘칸’이라는 칭호 대신에 ‘아미르(지휘관, 총독)’를 사용하면서 때로는 그 앞에 부주르그(buzurg) 또는 칼란(kalan)을 붙여 ‘위대한 아미르’라 자칭했다.


칭기즈칸의 혈통보다는 티무르의 후손임을 강조한 무굴 제국 황실은 자신들의 왕조를 구르카니(Gurkani)이라고 불렀다. 이 말 gurkani는 ‘부마, 사위’라는 뜻의 몽골어 큐뢰겡(kürügän)의 와전이다. 당당하게 황제인 칸이라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위국가라는 취지의 큐뢰겡으로 자칭하며 몸을 낮춘 이들의 저의나 저력은 무엇일까. 형식보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유목민의 현실주의일까. 완장에 집착하고 쥐꼬리 같은 권력을 남용하는 속물주의(snobbery or Philistinism)가 만연해 있는 우리네 과거, 그리고 오늘날의 모습이 쓸쓸하게 그려진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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