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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안에 나타나는 가장 큰 신비
‘우주’ 안에 나타나는 가장 큰 신비
  • 윤지은 기자
  • 승인 2015.03.25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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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일반상대성이론 완성 1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 장회익 교수
2015년 올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후 10년 뒤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성공회대 과학생태신학연구소(소장 김기석)가 지난 16일 성공회대 새천년관에서 ‘일반상대성이론 완성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주제는 ‘일반상대성이론, 우주를 품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함께 그려보는 우주 이야기’였다. 주제 강연은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가 맡았고, 이석영 연세대 교수(천문우주학과)가 「우주에 관한 현대 천문학적 이해」를, 김기석 성공회대 교수 「우주론과 신학의 대화」를 발표했다. 이날 주제강연을 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우주 이야기’에 담길 내용과 의미: 일반상대성이론 100주년에 즈음하여」 일부를 발췌했다.
정리 윤지은 기자 jieun@kyosu.net

우리가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 물어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이 하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나는 어떠한 세계에 있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물음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인류의 모든 문명 안에는 어디나 예외 없이 이러한 물음과 해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인류는 다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물음을 새롭게 물어 왔고, 때에 따라 도약적인 새 해답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동아시아 문명의 경우 끝내 이 물음을 하나로 연결해 추구해 왔음에 비해, 서구 문명권에서는 어느 시기에 이를 두 개의 물음으로 갈라 앞부분은 과학이 담당하고 뒷부분은 종교가 담당하는 형태의 분업적 상황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태극도설’ 이상의 큰 진전을 보여주지 못한 반면, 서구 문명권에서는 특히 과학의 힘을 빌려 ‘창세기 이야기’를 크게 넘어서는 오늘의 ‘우주 이야기’를 마련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됐다.


서구 문명권의 경우, 그리고 서구 문명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는 현대 문명 전반에 걸쳐,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성취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전통 종교와의 융합과 조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오게 됐다. 이 점에 대한 구체적 해답은 앞으로 (특히 이 심포지엄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의 대화를 통해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일이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구체적인 종교와의 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있는 한두 가지 가능한 관점만을 짚어보기로 한
우선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종교는 필요치 않으리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미 반세기 전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그의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생명에 대해 현대 분자생물학이 말해주는 주요 내용을 소개한 후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인간이 과학이 갖고 있는 모든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의 완전한 고독과, 스스로 근원적으로 단절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집시처럼 낯선 이역 땅에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우주는 그의 음악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며, 그의 고통이나 죄악에 대해서도, 또한 그의 희망에 대해서도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모노가 읽어낸 ‘우주 이야기’의 결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 이야기’를 다시 찬찬이 읽어나간다면 우리는 결코 근원적으로 단절된 존재도 아니며 집시처럼 낯선 이역에 살고 있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태어났고, 이 우주가 우리 집이며, 우리 몸이기도 하다. 더 한층 놀라운 것은 우리는 ‘나’라고 불리는 주체를 형성하고 있고, 이 ‘나’의 의지에 따라 ‘삶’이라는 것을 영위해나간다는 사실이다. 이 신비로운 ‘나’와 ‘내 삶’이라는 것은 우주의 질서 안에서 이와 철저히 동행하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철저한 자유의지의 형태로 이를 이끌어가고 있다.


우주 안에서 이러한 신비가 발생한다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그래서 ‘우주’인 내가 ‘우주’인 나를 보고 ‘우주’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는 것, 이것이 진정 우주 안에 나타나는 가장 큰 신비다. 이것은 우리의 몸, 곧 생명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면서도 생명의 물질적 측면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지평에 해당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를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까. 생명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신적 존재’라고도 불릴 수 있고 또 ‘존재의 근원’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그 어떤 존재가 태초에 ‘끝없는 되어감(becoming)’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본다. 우리가 신의 개념을 도입할 것인지, 또 도입한다면 이를 어떻게 도입할 것인지, 이는 각기 처한 종교적 신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도입하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이상 더 신비로운 방식으로 도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신이 아직도 숨겨져 있는 신비라면, ‘나’는 이미 드러나 있는 신비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드러나 있는 이 신비를 통해 궁극의 신비―만일 그러한 것이 있다면―를 찾아나서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우주 이야기’ 혹은 ‘우주의 자기 이야기’ 속에는 바로 이 신비를 찾아나서는 ‘나’ 자신의 모습도 담아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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