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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계]소르본대에 임명된 영국인 철학교수
[해외학계]소르본대에 임명된 영국인 철학교수
  • 김유석 프랑스통신원
  • 승인 2002.1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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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9 12:35:38
철학교수 자격시험 대비 수업이 열리는 소르본의 한 대형 강의실. 올해 시험주제로 선정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강의를 듣고자 사방을 빼곡이 매운 1백50여명의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선 신임교수의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약간 창백한 안색을 한 그의 모습은 허리까지 길러 리본으로 묶은 긴 머리하며, 흰색 블라우스와 가죽 조끼, 마상마술 시합의 기수를 연상시키는 바지와 하이힐 등이 마치 17세기를 살다 갑자기 21세기로 튀어나온 영국 귀족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입을 열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저히 불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영어 억양 때문이었다. “강의 시작에 앞서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교수자격시험’이란 걸 쳐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여러분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도 궁금하군요. 여러분이 통과해야 할 시험은 무척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이 시험에 대한 특별한 노하우나 경험은 없지만, 에피쿠로스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와 함께 악전고투하는 동안 우리는 이 철학자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식들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소르본대는 작년에 은퇴한 질베르 로메이에-데르베(Gilbert Romeyer-Dherbey) 교수 후임으로 영국인 조나단 반즈(Jonathan Barnes)를 서양 고대철학 담당 교수직에 임명했다. 최근까지 스위스의 제네바대 교수였던 조나단 반즈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대철학사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권위자이다. 그는 고대 자연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및 스토아 학파 등에 관해 무수한 저서와 논문들을 발표해왔으며, 그의 분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철학사 해석은 오늘날 고대철학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업적과 명성만을 놓고 보자면, 그가 소르본의 교수로 선정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결과는 소르본대가 지닌 독특한 전통을 살펴본다면,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이나 미국 등지에서 저명한 외국인 교수를 고액의 연봉으로 스카우트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학문의 경우, 외부로부터 어떤 새로운 이론이나 연구 경향이 자국 내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학자들이 지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특정 분야에 관해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연구 조류나 다른 방식이 제시될 때, 프랑스의 학자들은 끊임없이 그것들을 자신의 전통과 견주어보고, 질문하고, 또 비판을 시도한다. 이러한 검토가 끝나고 자기들에게 없는 어떤 새로운 가치가 인정될 때, 비로소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소르본대 철학과는 프랑스 내에서 철학사 연구의 중심지임을 자처해오면서, 지난 백여년간 신 토마스주의와 독일 관념론, 그리고 현상학적 방법에 기반한 철학사 연구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미의 분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론이 전 세계적으로 철학사 연구의 지배적인 경향이 돼왔던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대학의 철학 교수들은 이런 경향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으면서 끊임없이 비판적인 시선으로 물음을 던져왔다. 그리고 올해 조나단 반즈 교수의 영입을 통해서, 그들은 그간 지속적으로 검토해온 이른바 앵글로색슨의 방법론을 자신의 전통 속에 품으려 한 것이다.

이런 모습이 언뜻 외래의 것에 대한 소극적인 배타성 정도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낯선 것이 다가올 때, 그것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평가한 뒤에 받아들이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수십 년에 걸친 검토작업을 통해 수용된 독일 철학으로부터 푸코나 들뢰즈 등 이른바 현대 프랑스 철학이 탄생한 것이 좋은 예이다. 전통을 유지하는 속에서 긴 호흡으로 새것을 검토하고 수용함으로써 다시금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려는 이들의 태도는, 학문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새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하루라도 더 빨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이자 경쟁력으로 이해되는 우리 사회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김유석 프랑스통신원 / 파리 1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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