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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정합주의’로 다원주의 과학을 지향하자
‘진보적 정합주의’로 다원주의 과학을 지향하자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5.03.1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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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92. 장하석 교수

▲ 장하석 교수 강연의 핵심은 ‘진보적 정합주의’로 다원주의 과학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장 교수의 강연이 지난해 11월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로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출처= EBS 강연 내용 캡쳐
과학과 비과학은 어떻게 구분할까. 과학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획득할 수 있을까. 과학은 어떤 형식으로 진보하는가. 도대체 과학은 무엇이며, 과학을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EBS는 지난 2월부터 오는 5월까지 장하석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의 총 13부작 강연을 방송했다. 강의 내용은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에 담겼다.

비과학에 대한 포퍼의 시각
장 교수의 부모는 “과학적인 것만 믿고 사는 게 인생은 아니다”라며, 비과학도 통계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보자. 검은 백조는 실제로 존재한다. 이를 모르고 하얀 백조만 본 사람들은 ‘근래 수천년간 인간의 눈에 띈 백조는 다 하얗다’고 결론내린다. 이는 쓸모없는 이론이 된다. 그렇다고 ‘지구 북반구 태생의 백조는 다 하얗다’고 결론 내리면 이는 미래에 어떤 관측이 나올지 미리 알아맞힌 것과 마찬가지다.
옳다 그르다 식의 논쟁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가설만 얻게 된다. 이들 가설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종교 역시 비과학적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세계관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과학과 역할이 같다. 차이는 세계관을 부여하는 방법에 있다.


과학철학에서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과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의 정신을 비판으로 봤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 이론이란 최대한 엄격하게 시험해야 하며, 시험에 실패한 이론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에 반해 종교는 신을 의심하지 않고, 시험에 실패한 신의 말씀도 제거하지 않는 독단적 태도를 지닌다. 포퍼는 이들의 방식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단지 과학적이지 않다고 했다. 과학자가 되려면 종교와 같은 독단적 태도를 피해야 한다. 문제는 실제 과학자 대다수가 독단적이라는 점이다.

과학은 진보와 보수의 융합이라는 쿤
미국의 철학자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유명한 책에서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처음 주장했다. 쿤은 과학연구의 목적이란 기존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패러다임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쿤의 정상과학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대로 따라가며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포퍼와 달리, 쿤은 기존 패러다임에서 틀을 잡고 어떻게 하면 자연을 그 틀에 더 잘 집어넣을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 차이로 포퍼와 쿤은 한때 대립하기도 했다. 1781년 천왕성이 처음 발견됐을 때, 과학자들은 이 행성의 궤도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만약 포퍼와 쿤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각각 어떤 의견을 제시했을까. 아마도 기존의 뉴턴 역학에 맞지 않기에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그렇다고 뉴턴 역학을 성급히 폐기할 순 없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어느날 한 과학자가 천왕성 너머 다른 행성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행성의 引力때문에 천왕성의 궤도가 조금 흔들렸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뉴턴 역학으로 천왕성 너머에 있는 행성 해왕성을 발견했고, 천왕성의 궤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쿤의 의견이 조금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장 교수도 과학 탐구란, 기준이 존재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경험을 토대로 지식을 쌓아갈 때 처음에는 감각에 의존해 시작하지만 이어 측정기구가 만들어지고 감각을 수정한다.
그렇다면 과학적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장 교수에 따르면,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의 궁극적 목표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과학적 실재론은 경험적 유효성과 관측 불가능한 부분에서의 진리라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에 반해 반실재론자들은 “그냥 경험적으로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것만 믿고 나머지는 모른다고 하자는 입장”이다. 장 교수는 대안으로 ‘실재주의’를 제안한다. 실재주의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실재에 대한 것을 최대한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진리’가 아니라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과학적 진리라는 것은 결국 과학의 진보와 결부된다. 과학의 진보에 대해 장 교수는 진리를 찾기보단 그 과정에 집중한다. 그는 철학의 오랜 논쟁인 토대주의와 정합주의를 각각 비판하면서 ‘진보적 정합주의’를 내세운다. 이는 ‘더 뻗어나가는 것’과 ‘이미 있는 것을 더 짜임새 있게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정당화가 잘된 믿음의 토대에는 정당화가 안 된 믿음이 놓여 있다”고 했듯이, 데카르트식 상징성이 가진 토대를 넘어서 앎에 대한 여정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결국 회의론과의 싸움이 아닐까.

상호 이득을 위한 다원주의 과학
미국의 과학철학자 래리 라우단은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이론 중 80~90%가 나중에 폐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다양한 이론을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보증되는 것은 경험적으로 성공한 이론뿐이다. 다윈주의 해석에 따르면 살아남은 것들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다. 때론 한 가지만 맞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여러 실천체계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게 더 이득일 수 있다.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장 교수는 다원주의 과학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지식을 불완전하다고 믿고 있다. 이유는 첫째, 개개인의 선입관이 지각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똑같이 감지한 것도 이론의 배경이 다르면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셋째, 많은 경우 우리는 기존 이론에 맞지 않는 새로운 관측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한다.


과학이 불완전하다면 왜 과학을 배워야 할까. 장 교수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실이나 공식 같은 세세한 과학 이론이 아니라 과학 방법이라고 말했다. 즉, 과학 탐구를 하려는 시도와 이러한 경험에서 익힌 과학 사고방식 그리고 과학지식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의 과학은 민중과학이라 불릴 정도로 과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름대로 실험 연구와 새로운 이론 전개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 결과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하고, 존 돌턴이 원자론을 주장하는 등 유명한 과학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장 교수는 과학이란 철저하게 인간적이라고 했다. 과학을 하는 과정의 모든 단계에 인간의 본성, 인간의 능력, 그 능력의 한계, 인간의 욕망과 목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이 동기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결국 과학은 탐구정신이며, 과학을 한다는 것은 상호 이득을 위해 탐구하는 것이다. 아직도 과학에 대한 모든 것은 논쟁거리이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새로운 과학 진리의 승리란 반대파를 설득해서 얻는 것이 아닌 반대파가 다 죽고 새로운 것에 익숙해진 새 세대가 자라나면서 이뤄진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나중에 과거의 연금술사들처럼 될 지 모른다.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보다 자연이 준 다양한 선물을 보존해보면 어떨까. 이런 노력이 다원주의에 맞는 진화이며 과학이 아닐까.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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