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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上의 바람에는 우즈벡의 땀냄새 … 지하엔 이채롭게 장식된 ‘메트로역’ 웅장
地上의 바람에는 우즈벡의 땀냄새 … 지하엔 이채롭게 장식된 ‘메트로역’ 웅장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3.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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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34. 중앙아의 중심 도시, 돌나라(石國) 타시켄트(1)

▲ 텔리야샤야흐 모스크에 보관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코란 우스만 꾸란. 텔리야샤야흐 모스크(Telyashayakh Mosque) 혹은 하스트 이맘 모스크(Khast Imam Mosque): 현존하는 最古의 코란인 우스만 꾸란(Uthman Qur'an)이 이곳에 있다. 655년에 만들어졌고, 살해당한 칼리프 우스만의 피가 얼룩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이 聖典은 티무르가 이라크를 정복하면서 바스라에 있던 정본을 사마르칸트 비비 하눔 모스크로로 가져왔다. 이를 1869년 러시아가 전승 트로피로 상트 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지 박물관으로 가져갔던 것을 1924년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왔다. 사진 김옥철 안그라픽스 대표

사마르칸트가 타지크족의 도시라면 타시켄트는 우즈벡족의 도시다. 물론 긴 유랑 끝에 물설고 낯설은 이국땅에 정착한 고려인도 20여 만 명이나 있다. 우즈벡인은 누구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세기 샤이바니라는 걸출한 지도자 덕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위대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Helen, thy beauty is to me 헬렌,            그대의 아름다움은 내겐
Like those Nicean barks of yore,            마치 옛날 천국의 섬 니사에서 온 니케의 범선 같아
That gently, o'er a perfumed sea,           부드럽게, 니사 섬을 에워싼 향기로운 바다를 지나
The weary, wayworn wanderer bore     긴 여정에 지친 방랑자 디오니소스를 싣고
To his own native shore.                      고향 바닷가 아말테안 곶으로 돌아오는.

On desperate seas long wont to roam,   오랫동안 떠돌던 절망의 바다 위에서
Thy hyacinth hair, thy classic face,       그대의 히아신스 닮은 보랏빛 머리칼, 고귀한 얼굴,
The Naiad airs have brought me home   물의 요정 같은 자태를 떠올리며 알았지
To the glory that was Greece                그리스의 영광과
And the grandeur that was Rome.          로마의 장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Lo! in yon brilliant window-niche          보라! 저기 빛나는 창 벽감 속
How statue-like I see thee stand,           마치 조각처럼 그대 서 있음을
The agate lamp within thy hand!           손에는 마노 램프 들고!
Ah, Psyche, from the regions which      아, 성스러운 땅에서 온
Are Holy Land!                                   사이키 요정이여!


                                                                                       _「To Hellen」 Edgar Allan Poe(1831)

위 의 시에서 오랜 여정으로 피로에 지친 나그네를 디오니소스로 보는가 하면 혹은 율리시즈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누가 됐든 무슨 상관이랴. 인생을 사는 이라면 누구나 삶의 여정으로 힘들고 지친 표랑자인 것을. 이런 이를 누가 慰撫해줄 것인가. 에로스에게 싸이키가 있었듯, 디오니소스에게 레아 여신이 있었듯, 사랑으로 지지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애초 노예가 아니었는데 노예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삶을 견뎠을까. 불시에, 예기치 않은 운명으로 가족과 이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든 거처를 떠나 낯선 곳에서 친절하지 않은 주인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라는 말은 질문의 본질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9세기 중반, 代의 북쪽 지역에 살던 安씨 성을 가진 敬思라는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新五代史』 「의아전」에 의하면, 代州 飛狐(지금의 하북성 源) 출신이라고 한다. 당나라 말기 혼란기를 五代十國 시대라 한다. 五代의 두 번째 왕조로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임하고 後唐(923년~936년)을 건국한 인물이 이존욱(李存勖)이다. 그에 의해 太祖로 추숭된 아버지 이극용(李克用, 856-908년)이 일찍이 代의 북쪽 땅을 노략할 때 이 아이를 얻었다. 기실 훔친 것이다. 남의 아이를 무단으로 포로로 잡아 데려왔다. 그리고 성명을 내리고 아들로 삼았다. 자신과 같은 성 李에 이름은 친자 存勖과 같은 항렬로 存孝(?∼894년)라 했다. 이렇게 安氏 성을 가진 다른 종족의 사내아이가 죄수 아닌 죄수로 낯선 집안에 억지로 들여와 義子가 됐다.
이극용에게는 義子가 많았다. 그는 의자들로 十三太保라는 호위무사군을 만들었다. 이극용은 본디 朱耶 혹은 朱邪라는 성을 쓰는 사타돌궐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李國昌의 본 이름은 朱邪赤心이었다. 변방을 지키는 이민족 장수로 삭주자사를 지내다 ‘방훈의 난(龐勛의 亂)’을 진압한 공적으로 國姓인 李姓을 하사받고 李氏로 變姓한 것이다. 이국창의 3남 이극용은 태어날 때부터 한 눈이 작아 ‘獨眼龍’이라고 불렸다. 작호는 鴉兒, 군에 있을 때 불리던 명칭은 飛虎子였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나타내는 이름들이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용감하고 무공이 빼어난 이극용은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정예병으로 구성된 흑아군을 이끌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나라 조정은 그를 晉王으로 봉했다. 이극용의 동료이자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인물이 朱全忠이다. 이극용과 주전충과의 권력쟁탈전은 자못 흥미롭다. 주전충은 원래 황소군의 중책을 맡았는데 후일 황소를 배반하고 당의 편을 들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우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유목민의 피를 타고 난 晉王 이극용이 어느 날 代州 북쪽 지역으로 노략질에 나섰다가 잡아온 아이가 李存孝다. 위에서 말했듯 본 이름은 安敬思였다. 성으로 미뤄 그의 출신은 어쩌면 소그디아나 오아시스 국가 소무구성의 아홉 나라 중 安國(오늘날의 부하라)일지 모른다. 중요한 건 의도치 않은 노예로서의 삶,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참담한 심정에 혼비백산의 나날을 보냈을 어린 소년의 고통과 슬픔에 찬 삶이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고, 義父 이국용의 호위무사가 됐다. 13명의 친위무사 중 그의 무술능력이 제일 뛰어났다.


또 다른 義子 중에 李存信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평소 이존효를 시기했다. 존효를 꼬드겨 의부인 이극용을 배신하고 달아나게 했다. 화가 난 이극용이 幽州에서 그를 잡아 太原으로 데려온 후 五馬分屍(혹은 五牛分屍)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이존효는 같은 의자인 존신에게 속아 어리석게도(?) 엄청난 고통 속에 삶을 마감한다. 이런 인생이 부지기수다.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노예가 된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노예를 포획하고 시장에 내다 팔고 그렇게 먹고사는 노예상인이나 노예 중개인, 그리고 전쟁이나 약탈로 노예를 양산하는 전쟁광과 도적들은 항시 존재한다.


義子가 됐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노예였다. 한 때 위기 상황에 처한 이극용이 城을 떠나 달아나려 하자, 繼母 劉氏가 그의 어리석은 결정을 나무랐다. 극용이 이존신의 의견을 따른 것이라고 하자. 유씨가 이존신 등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저 양치기 노예들(牧羊虜)이 어떻게 원대한 계책을 낼 수 있겠는가(彼牧羊虜 安辨遠計)?” 아무리 주군을 지키는 친위대의 호위무사가 됐지만, 義子로 입양된 신분이었지만, 이들은 변함없이 노예들이었던 것이다. 변변한 집도 없이 양가죽으로 만든 헐렁한 천막집에 살며 수초를 따라 다니며 양이나 치는 오랑캐 출신의 노예인 것이다.


노예는 어디나 있었다. 노예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slave가 Slav에서 왔을 가능성을 얘기한 적 있다. 그런가 하면 영어 단어 family의 어원은 참으로 아이러닉하다. ‘노예, 노비’를 뜻하는 라틴어 familia에서 파생됐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 『三國志』「魏志 烏丸鮮卑東夷傳」 西戎 條를 바탕으로 흉노인들이 외부집단과 싸워 포획한 노예들 대부분을 종으로 삼았고, 이들 종을 흉노말을 한자로 음차해 ‘자()’라고 표기했음을 거론했다. 과연 당시 흉노말은 어땠을까. 우리말 종의 고대음은 ‘죵’이었다.


퇴계 선생(1502~1571년)이 손자들에게 나눠준 노비의 수가 무려 367명이라는 사실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聖學인 性理學을 국가 이념으로 세워진 조선에 16세기를 넘어서면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노비가 된다. 신사임당의 친정집 노비만도 162명이었다 한다.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 집안에도 임진왜란에다 기근과 돌림병으로 많은 수가 죽고 뿔뿔이 흩어졌음에도 남아있는 노비가 146명이었다니 당시 유세깨나 하는 집안의 노비가 군 일개 중대는 넘었음을 알 수 있다.


노예 출신이 왕조를 창업하는 경우가 있다 했는데, 맘루크(Mamluk)가 그 대표 사례라 할 만하다. Mamluk는 이른바 칼리프에 직속된 노예 신분의 군인을 가리키는데, 본래 ‘소유된 자’라는 의미의 말이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말로 굴람(Ghulam)이라는 아랍어가 있다. 종복(servant), 시동(boy), 청년(youth)이라는 뜻이다. 천국의 젊은 하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압바스, 오스만, 사파비드, 무굴 왕조의 노예병사를 가리키는데도 사용됐다. 맘루크는 주로 이집트를 비롯한 中近東 지역, 굴람은 이란 너머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쪽에서 쓰이는 경향이 있다.


맘루크의 출현 배경은 이렇다. 앞서 호라산 총독에 임명돼 부하라 등지를 침공한 우베이둘라가 곧바로 이라크 총독에 임명돼 바스라로 귀환할 때 ‘부하라의 射手’ 2천 명을 데리고 가 자신의 호위대로 삼았다고 했다. 이렇듯 압바스 왕조를 비롯한 이슬람 왕조에서는 중앙아시아나 기타 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시켜 맘루크로 육성했다. 맘루크 중 상당수가 튀르크인 내지는 소그드인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킨 고용주 외에는 아랍-이슬람 제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원하던 아랍 군주들에게 환영받았다.


맘루크집단은 13세기 이슬람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패, 권력집단화 하거나 지방에 할거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다가 아예 나라를 세우고 지배층이 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는 북인도의 델리 술탄 왕조와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맘루크 왕조가 유명하다.
이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의 장소를 부하라에서 타시켄트로 옮긴다. 중앙아시아의 한복판에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벡족이 중심이 된 나라다. 이 나라의 수도는 ‘돌의 도시’라는 의미의 타시켄트(Tashkent). 옛 중국 문헌에는 자지(支), 자절(折), 자시(時) 등 다양한 한자어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는 다 ‘tash(돌)’의 이표기일 뿐이다. 漢나라 때는 오늘날의 페르가나 분지에 자리한 大宛國 북쪽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소무구성의 하나였으나, 이곳을 다스리던 왕의 姓은 石이었다. 『新唐書』 「西域傳」에 따르면, “安西節度使 고선지가 그 나라 왕이 藩臣의 예를 갖추지 못한다고 탄핵하며 토벌할 것을 청했다”고 한다. 藩臣이란 대국의 책봉을 받은 소국의 親王이나 郡王을 말한다. 따라서 藩王은 번신으로서의 예를 갖출 것이 요구됐다.

▲ 정교한 이슬람 목공예품. 중앙 윗부분에 있는 책 받침대에 코란 등을 얹어놓고 읽는다.

중앙아시아 지역이 1991년 구소련연방이 해체되며 예속상태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독립국가로 자립하기 전, 타시켄트는 구소련 4번째 도시였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 페테르부르그), 키예프(우크라이나의 수도) 다음 가는 발전된 도시였다. 지금은 경제력이 카자흐스탄에 밀려 중앙아시아 지역 맹주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돈을 벌고자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알마타(카자흐스탄의 이전 수도)로 이주를 한다.


타시켄트에 가서 감동 받은 일 중 하나. 바로 지하철역이다. 티무르 박물관에서 만난 타시켄트대 영문과에 다니는 학생의 안내로 타시켄트 시민의 자부심인 메트로를 탔다. 역 하나하나가 글자 그대로 예술작품이었다.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Tashkent라 하지 않고 Toshkent라고 한다. 그리고 메트로를 우즈벡말로 토시켄트 메트로폴리테니(Toshkent metropoliteni)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메트로와 타시켄트 메트로만 있다. 타시켄트 메트로는 총연장 36.2km에 노선은 3개, 지하철역은 29개다. 타시켄트 방문 시 우정 메트로를 타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깊은 땅 속에 지어진 메트로 역이 저마다 독특하고 이채롭게 장식돼 있기 때문이다.


사마르칸트가 타지크족의 도시라면 타시켄트는 우즈벡족의 도시다. 물론 긴 유랑 끝에 물설고 낯 설은 이국땅에 정착한 고려인도 20여 만 명이나 있다. 우즈벡인은 누구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세기 샤이바니라는 걸출한 지도자 덕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위대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15세기 전반 주치 울루스(the Ulus of Juchi) 동부에서 우즈벡(Uzbek)이라 불리는 유목민 집단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 집단의 리더는 칭기즈 칸의 큰 아들 주치의 다섯 번째 아들 샤이반(Shiban, Sheiban, or Shayban)의 후손인 아불 하이르 칸(Abu'l-Khayr Khan, 재위: 1428~1468년)이었다. 열일곱 나이 때인 1428년 그는 白帳汗國의 벡(beg: chief or commander)으로서 샤이반 가문의 다른 경쟁자들을 타도하고 宗家인 사라이 정권(즉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몽골제국 4개 汗國(khanate) 중 하나인 킵차크 칸국(1240년대~1502년)을 사라이 정권이라고 하는 이유는 수도가 사라이 바투(Saray Batu, ‘바투의 왕궁’)이기 때문이다. 킵차크 칸국을 세운 바투(Batu, 1205~1255년)는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Juchi or Jochi)의 차남이다. 주치에게는 적어도 14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단호한(batu)’ 칸 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바투는 부친의 속령 통치권을 계승했다. 바투가 세운 이 나라를 金帳汗國(the Golden Horde, 몽골어로는 Altan Ordu)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백장한국은 몽골 제국의 여러 칸국 중의 하나로 킵차크 칸국의 서부에 속했다. 첫 번째 칸은 주치의 장남인 오르다(Orda)였다. 수도는 발하슈 호에 있었으나 후일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야 강변의 시그나크로 옮겼다.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의 5남 샤이반의 후손으로 백장한국의 벡이었던 아불 하이르 칸 (1412~1468년)은 열일곱 나이에 툴라 강을 거점으로 하는 투멘족을 중심으로 샤이반 울루스의 유목 집단을 연합해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런데 1466년 같은 주치 가문 출신인 자니벡 칸과 케레이 칸이 시르다리야 강 중류 유역을 근거지로 하던 일단의 유목민들을 이끌고 모굴리스탄 변경으로 떠나 새로운 칸국을 건설했다. 이들을 우즈벡-카자흐 또는 그냥 카자흐라 부르는데 이들이 오늘날의 카자흐족의 기원이 됐다.


1468년 아불 하이르 칸이 세상을 뜨자 우즈벡 울루스는 곧바로 분열 상태에 놓인다. 아들 샤 부다크 마저 같은 해 사망했다. 그때 아불 하이르의 손자이자 샤 부다크의 아들인 무함마드 샤이바니(Muhammad Shaybani, 1451~1510년)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의 본명은 아불 파스 무함마드(Abul-Fath Muhammad)였다. 그가 뿔뿔이 흩어진 유목민들을 규합해 우즈벡의 부흥을 도모한다. 무척 힘들고 긴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여러 지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다. 37세가 된 1487년 모굴 칸국의 마흐무드 칸의 신하가 돼 그로부터 야씨시의 통치를 위임 받은 후 샤이바니는 흩어져 있던 우즈벡 유목민들을 재규합할 수 있었다. 유목민 우즈벡족을 우뚝 서게 한 지도자 샤이바니와 무굴제국을 세운 ‘호랑이’ 바부르와의 인연은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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