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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철학사의 전개를 넘어 思惟가 도달한 곳
개별 철학사의 전개를 넘어 思惟가 도달한 곳
  • 교수신문
  • 승인 2015.03.0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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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독일철학사: 독일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이신철 옮김|에코리브르|437쪽|25,000원

물론 중요한 것은 ‘독일철학사’라는 제목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회슬레의 구상에서 ‘독일철학사’는 독일어로 수행되는 철학적 사유의 역사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철학사의 초기부터 철학과 철학사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철학 자신의 가장 고약한 과제로 여겨져 왔다. 철학사는 전적으로 대립하는 체계들을 포괄하는 가운데 모순적으로 전개되는 까닭에 철학의 진리요구를 단적으로 상대화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사를 둘러싼 노력은 역사적이고 유한한 계기와 초역사적이고 진리를 주장하는 계기 사이의 매개를 위한 고투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철학사에서 모종의 발전 노선이 확인될 수 있을까. 있다면 그 발전 구조는 무엇일까. 그러나 이 물음들이 어떻게 대답되든 하나의 철학사 일반이 아닌 여러 철학사들 각각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한국철학사’, ‘독일철학사’ 등등에서도 과연 그러한 유의미한 발전 노선이 확인될 수 있을까. 이것들은 비토리오 회슬레의 『독일철학사』를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물음들이다.


일반적으로 회슬레의 철학적 작업은 상대주의·회의주의적인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서 객관적 관념론의 부흥을 시도하고 그로부터 현대의 시급한 과제에 부응하는 실천철학의 가능성을 근거 짓는 것이다. 여기서 객관적 관념론이란 철학사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헤겔의 철학체계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철학적 입장으로 다음의 두 가지 근본원리를 지닌다. 첫째, 만약 논리적·이념적인 것의 절대성이 최종적으로 근거지어진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면, 오로지 그것만이 현실적·절대적 원리로서 고찰돼야 한다. 여기서 논리적·이념적인 것은 한갓 주관적인 사유원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객관적인 존재 영역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그와 같은 이념적인 것은 동시에 실재하는 세계를 근거 짓는 원리로서 파악돼야 한다. 즉 그것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사유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선험적 근본원리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 관념론의 입장은 과연 엄밀하게 근거지어질 수 있을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회슬레는 한편으로는 최종근거짓기 방법을 통해 객관적 관념론의 근본사상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사 전개의 내적 구조를 제시함으로써 객관적 관념론의 필연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회슬레가 생각하는 철학사의 내적 필연성이란 철학사의 서로 구분될 수 있는 시대들이 상호간에 눈에 띄는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철학, 헬레니즘-로마철학, 중세철학 그리고 근대철학은 모두 처음의 소박한 형식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경험주의적 발상의 도전을 받고, 경험주의적 발상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회의주의·상대주의적 위기로부터 모든 비판에서 이미 전제되는 합리성에 대한 초월론적 반성들이 전개되며, 객관적 관념론의 구조 유형을 지닌 종합적 철학이 하나의 순환을 완결한다. 이 유형의 철학들은 구조적 완전성을 요구할 수 있긴 하지만 물론 그 실질적 내용에서는 불완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여기에 한 단계의 순환을 넘어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진보의 근거가 놓여 있다.


이러한 구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논리’가 ‘역사’적인 만큼이나 ‘역사’ 역시 ‘논리’적이라는 회슬레의 통찰이다. 사실 ‘철학사를 통한 철학하기’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철학 수행 방법은 회슬레의 작업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해 왔다. 회슬레는 그리스철학사와 플라톤철학에 대한 해석을 전개하는 『진리와 역사』, 헤겔철학의 체계이론적 분석과 객관적 관념론의 상호주관성 이론적인 변형을 시도하는 『헤겔의 체계』, 그리고 이성의 위기에 대한 철학사적 추적을 토대로 하는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 그리고 정치철학이 윤리학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고전적 확신과 윤리학적 논증들 그 자체가 정치적 기능을 갖는다는 좀 더 근대적인 개념과의 종합을 제시하는 『도덕과 정치』 등에서 그와 같은 철학적 사유 수행을 보여줬다. 그래서 회슬레의 철학적 사유의 전개를 주시하는 이들에게는 철학사 전체에 대한 파악과 객관적 관념론의 철학체계 구상의 실현이 그에게 있어 어떠한 모습으로 통일돼 드러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이지 않을 수 없었다.


회슬레는 『독일철학사』에서 중세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독일철학의 역사에 대한 개관을 제공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독일철학사’라는 제목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나, 베를린, 또는 프라이부르크와 마찬가지로 빈과 쾨니히스베르크가 중요하다. 회슬레의 구상에서 ‘독일철학사’는 독일어로 수행되는 철학적 사유의 역사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이웃 정신사들로부터 구별되는 독일정신사는 더 이상 라틴어가 아니고 아직은 영어가 아닌 독일어가 학문어로서 사용된 한에서 존재했거나 존재한다. 이렇듯 회슬레는 독일철학사와 그 밖의 철학사들과의 분리를 ‘독일어’에 의해 정당화하는 데서 시작해 몇 세기에 걸친 철학의 도정을 추적한다. 그는 원전에 대한 철저한 지식에 토대해 독일철학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에 대한 솔직하고도 비판적인 평가를 수행하며, 마침내 독일정신에 대한 회고를 21세기에 독일철학의 생존에 관한 회의적인 물음으로 끝맺고 있다.


어떤 ‘종언’ 논의에 따르면, 하나의 사태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그 전개의 필연성은 그것이 ‘종언’에 도달했을 때야 비로소 밝히 드러난다. 회슬레는 다른 철학적 전통과 구별되는 ‘독일철학의 특수한 도정’을 ‘정신 개념’에 대한 집요한 성찰과 ‘철학적 형식의 종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에서 구한다. 그는 독일철학의 탄생을 에크하르트와 쿠자누스에게서 찾고, 그 본격적인 성장을 이끈 철학자로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꼽으며, 정점으로 이끈 철학자로 독일관념론의 완성자인 헤겔을 내세운다. 헤겔은 그 이전의 독일철학의 위대한 혁신과 지적 성취를 가장 복잡한 형식의 체계철학으로 통합해 ‘새로운 형식의 철학적 종교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헤겔 이후 독일철학은 그것을 그리스철학과 더불어 ‘인류사에서 두 개의 가장 매혹적인 철학’의 하나로 만들었던 스스로의 고유한 정신을 파괴하는 과정, 즉 ‘독일철학의 몰락’과 ‘독일정신의 종언’ 과정으로 치닫는다. 이 과정의 선구자는 쇼펜하우어와 니체고,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하이데거다. 가령 니체는 ‘보편주의 도덕에 대한 반란’을 통해 ‘도덕적 냉소주의’를 만연시켰고,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도덕적 의미를 전복’시켜 ‘무엇을 위한 것이든 결의성이 유일한 관건’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독일의 재앙’에 기여했다. 이렇듯 『독일철학사』에서 회슬레는 ‘독일철학사’를 ‘의식적으로 그 정점으로서의 독일 관념론에 비추어 해석’하며, 그 스스로 책의 입장이 자기 자신의 철학에 의해 각인돼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그런 한에서 지금 『독일철학사』는 하나의 개별 철학사의 전개를 서술해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회슬레의 본래적인 철학적 사유 수행, 즉 객관적 관념론의 체계구상 및 철학사 파악의 정당성을 사유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신철 철학 연구자
필자는 건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관념론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논리학』 등의 저서와 『칸트사전』, 『헤겔사전』,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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