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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사막 속 오아시스 ‘安國’에서 만난 두 명의 역사 인물 ‘록산’
황량한 사막 속 오아시스 ‘安國’에서 만난 두 명의 역사 인물 ‘록산’
  • 교수신문
  • 승인 2015.01.2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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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31. 록산느(Roxanne)의 탱고, 부하라(Bukhara)

▲ 칼리안 미나렛을 중심으로 한 부하라 전경. 사진= KBS 장영주 PD

처음 부하라에 갔던 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데 호텔 로비에서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들렸다 고단한 여행자의 마음이 자연스레 끌렸다 필자처럼 마른 남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파트너인 젊은 여성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자연 속에 있으면 외로울 틈이 없다. 외로움이 가슴 떨리는 기쁨으로 변한다.”  ―정자

새해가 됐고 날은 추웠다 풀렸다를 되풀이 한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시절은 달라져 아궁이에 불 때서 구들장을 덥히던 것이 보일러 난방으로 대치되고, 군고구마는 직화냄비에 구워먹는 좋은 세상이 됐다. 물론 편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필자의 증조할머니께서는 겨울철이면 옛날이야기를 자주 손주에게 들려주셨다. 그리운 일이다. 요즘 그런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문화의 전승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는 여우가 사람이 버린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된다는 해괴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에 가능하지 않은 일은 없는 법이다. 『隋書』 「西域傳」에도 설마 할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安國은 한나라 때의 安息國이다. 왕의 성은 昭武氏이고 康國의 왕과 동족이며, 字는 設力이다. 처는 강국왕의 딸이다. 도읍은 那密水 남쪽에 있고, 성은 다섯 겹인데 흐르는 물로 둘러싸여 있다. 궁전은 모두 평평한 지붕[平頭]으로 돼 있고, 왕좌는 황금 낙타 모양으로 돼 있는데 높이는 7~8척이다. 정사를 논의할 때마다 부인과 함께 마주 앉아서 하며, 3명의 대신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한다. 풍속은 강거와 동일하나, 다만 자기 자매를 부인으로 삼고 같은 어머니의 자식들이 상호간에 금수 같은 짓을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누이나 누나를 아내로 삼는다고 해서 이를 짐승 같은 행태라는 것이다. 왕씨의 나라 고려 초기 왕실 혼인도 이랬다. 문화란 시간에 따라, 공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고유한 문화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인문학이 사람살이에 줄 수 있는 교훈은 닫힌 세계를 벗어나라는 것이다.
安國이 어디인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자리한 도시 부하라(Bukhara)다. Bukhara라는 이름은 ‘행운의 장소(Place of Good Fortune)’라는 의미의 소그드어 βux­arak에서 생겨났다. 또 소그드어 βux­arak는 ‘불교 승원(Buddhist moansteries)’이라는 뜻을 갖는 산스크리트어 vihara에서 파생됐다. 과거 이 도시에 불교가 흥성했음을 보여주는 명칭이다.


중국 史書에 安國으로 기록된 古都 부하라의 여름은 무척 덥다. 한낮의 기온이 섭씨 50도 이상 올라가기도 한다. 半사막 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隊商이나 순례자, 외교 사절들의 이정표 내지 사막의 등대 역할을 했던 칼리안 미나렛(Kalyan or Kalon minaret, ‘大尖塔’)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과거 이곳이 황량한 사막 속 오아시스임을 알게 된다.
십여 년 전 처음 부하라에 갔던 날, 날은 덥고 지친 일행들은 피로를 풀겠다며 마사지를 원했다. 수요는 많고 마사지를 제공할 마사지사는 적었다. 어렵사리 공급책 역할을 마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데 호텔 로비에서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들렸다. 고단한 여행자의 마음이 자연스레 끌렸다. 필자처럼 마른 남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파트너인 젊은 여성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연주 솜씨에 감탄하며,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행운에 기뻐하며 한참을 바이올린 선율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다. 로비의 청중은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 셋이 전부였다. 연주가 끝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나서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보니 부하라 대학 음악과 교수라고 했다. 호텔에서의 연주는 부업이라고 했다. 동업자의 심정이 씁쓸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는 군대를 이끌고 당시 페르시아의 속주였던 발흐(Balkh)라는 이름의 박트리아(Bactria) 지방(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Balkh주)을 침공한다. 부하라와 지리적으로 멀지 않고 문화적으로 일치하는 지역이다. 역사는 그의 편이었다. 마침내 ‘소그드의 바위(Sogdian Rock)’라는 난공불락의 성채를 함락시키고 그곳의 지배자 (박트리아인) 옥시야르테스(Oxyartes)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 戰勝者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문득 요즘 시리아에서 생겨난 이슬람 국가(IS)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이 용병, 이른바 volunteer에게 70명의 여인을 주겠다는 황당한 미끼로 소영웅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현실이 떠오른다.


뜻하지 않게 이방인의 아내가 돼야 했던 당시 16세 여인의 이름은 록산나(Roxana), ‘눈부신 아름다움(luminous beauty)’이라는 뜻을 지닌 소그드어다. 이듬해인 기원전 326년 록산나는 알렉산더의 북인도 정벌 길에 동반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알렉산더가 급작스럽게 죽고 그녀는 후일 아에구스(Alexander IV Aegus)라 불리게 되는 유복자를 낳는다. 그리고 자신 이외의 알렉산더의 다른 아내들인 스타테이라(Stateira) II세와 그녀의 자매 드뤼프테이스(Drypteis) 혹은 파뤼사티스(Parysatis) II세(알렉산더의 세 번째 부인)를 죽이고자 한다. 마케도니아에 있던 알렉산더의 모친 올림피아(Olympias)의 비호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기원전 316년 올림피아가 시해당하고 카산데르(Cassander)가 왕권을 손에 넣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록산나의 아들 아에구스가 제국의 합법적 계승자였기 때문에 마침내 카산데르는 눈엣가시였던 두 사람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린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3세기 중반 경, 카스피해 동남쪽에 해당하는 코페트다우 북쪽 기슭의 테젠강(the river Tejen) 유역에서 히르카니아(Hyrcania)에 걸쳐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스키타이계 혹은 박트리아계 혈통의 파르니족(the Parnis) 추장 아르사케스(Arsaces<Arsak) 형제가 부족민을 이끌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농경 박트리아 지방의 사트랍(satrap, 고대 페르시아의 太守)을 공격하고 독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왕조가 바로 아르사케스 왕조의 파르티아(Parthia)다.

▲ 알렉산더와 록산나.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가 피에트로 로타리(Pietro Rotari)의 1756년도 작품이다.

이 파르티아가 바로 安息國이요, 安國이 바로 안식국이라고 중국사서는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李氏’가 세운 ‘조선’이었다. 이씨는 지배집단이고 조선은 국명이다. 마찬가지로 安息은 부족장 아르삭(Arsak)의 한자 전사이고, ‘Parth(=Parni)의 나라’라는 의미의 국명 Parthia는 부족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전에는 지배 세력의 교체로 인해 동일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의 명칭이 바뀌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에 의해 정권이 달라진다. 아직도 신비의 종족으로 여겨지는 Parni라는 부족과 Arsak라는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月支의 이동과 관련해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잠시 무대를 중원으로 옮겨보자.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玄宗 때 唐이 대외적으로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절, 겨울 추위가 한창이던 12월 중순 안북절도사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다. 그는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른바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다.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햇수로 9년, 실제적으로는 7년 2개월) 안록산과 그 부하인 史思明과 자식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 때문에 중국은 크나큰 홍역을 치룬다. 천하의 명장 고선지의 목숨을 앗아간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성을 따서 지은 명칭으로 ‘안록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은 거란, 철륵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정예 8천여 騎를 중심으로 漢兵과 蕃兵 도합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范陽(오늘날의 北京)에서 거병해 東都인 洛陽으로 진격했다.


난을 일으킨 지 채 한 달이 안 돼 낙양을 점령한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燕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756년 1월). 당은 속수무책이었다. 파죽지세로 장안까지 쳐들어오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다. 장안을 지키는 동쪽의 요충지 동관도 안록산 일당의 수중에 들어갔다.
부리나케 피난길에 오른 황제는 자신을 호위하던 친위대의 거센 항의에 부딪쳐 눈물을 머금고(?) 양귀비에게 목을 매 죽을 것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결국 양귀비는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양귀비가 죽고 불과 열흘 뒤인 다음 달 5월 장안이 함락된다. 그러나 방심과 오만은 화를 부른다. 스스로 황제가 되고 겨우 1년 뒤인 757년 1월 안록산은 자신의 맏아들(안경서)에게 살해당한다. 失明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성격이 횡포해졌다고는 하나 권력욕은 부자지간의 천륜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부자지간이 이럴 바에야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더 이상의 신의를 기대하기 힘들다.


河北 13군을 장악하고 8만 명의 병사와 함께 당에 투항했던 안록산의 부장 사사명이 758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토벌군을 상주에서 대파한 안경서를 죽이고 낙양을 점령했다(759년). 그러나 사사명 또한 자신의 맏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한다(761년). 이런 와중에 당 현종도 사망한다(762년). 하늘은 아직까지는 당의 편이었다. 763년 1월 사조의가 자살함으로써 난이 평정되기에 이른다. 그가 죽은 건 범양절도사 이회선과 당나라를 도운 몽골초원의 새로운 맹주 위구르군의 공격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 때문으로 여겨진다.
기나긴 내란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3천60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한다.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했다. 753년 5천288만488명이던 인구가 764년에는 1천690만명으로 기록됐다.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킬링필드였던 셈이다. 이 전란으로 인해 597만 호가 사라짐으로써 한 호당 6인 기준을 삼아도 애꿎은 농민 병사들이 3천600만 명 넘게 죽었던 것이다.


내란의 원인으로 당나라 중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을 든다.‘開元의 治’(713~741년)를 이끌었던 현종은 양귀비의 미색에 빠져서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됐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는 유명무실하고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염치를 모르는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록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 작금 한국 땅에 十常侍 논란이 일고 있다. 십상시는 중국 후한 말 靈帝 때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명의 中常侍, 즉 宦官들을 말한다. 민주주의 사회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정치를 책임지는 인사들이 적극 참고했으면 하는 대목이다.


일찍이 안록산은 천보 원년(742년) 새로 설치된 평로절도사가 되고 천보 3년에는 범양절도사를 겸했다. 그는 체중이 필자의 세 배가 넘어 무려 230斤(약 200kg, 우리나라의 斤과 다름)이나 나가는 보기 드문 거구로 뚱뚱하다 못해 늘어진 배는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 한다. 사람의 취향은 저마다 독특하다. 양귀비는 이런 안록산이 마음에 들었는가 보다. 익살스럽고 털털하며 모나지 않고 수수한 성격을 지닌 안록산은 손쉽게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고 싶다고 자청한다. 얼마나 듬직한 제안인가. 그는 입궐하면 먼저 양귀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다음에 현종을 배알했다.


황제의 신임 속에 안록산은 수시로 궁중에 출입했으며 때로는 궁중에서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있어 이 때문에 양귀비와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다. 그래도 현종은 의심하지 않고 다시 안록산에게 河東 절도사를 겸하게 했다. 현종은 장안에 호화로운 주택을 지어 안록산에게 주는 등 그를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잇달아 들어오는 안록산의 반란 보고를 들은 현종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명분과는 별도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원인이 어쩌면 양귀비와의 사사로운 사랑 때문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나는 지울 수 없다. 두 사람이 눈 먼 사랑에 빠지게 된 배경에는 출신 지역이 같다는 점이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황제는 35세나 연상인 노인에다(22세와 57세 간의 연상연하 사랑) 생김과 문화가 다른 한족(이씨)이었다. 이런 판단을 하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貴妃 楊玉環은 서역 출신의 여인이다. 오늘날의 중국 四川省에 해당하는 그녀의 고향 蜀은 당시 이민족의 땅이었고 거기에는 서역에서 이주한 여러 종족들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안록산 역시 서역 출신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이다.


안록산의 姓인 安은 그가 소그디아나의 한 나라였던 부하라의 중국식 이름인 安國 출신임을 나타낸다. 정확히 말하면 안록산의 아버지는 소그드인, 어머니는 돌궐족이다. 록산이라는 이름을 앞서 알렉산더의 부인 록산나에서 보았듯‘빛나는 아름다움(luminous beauty)’이라는 뜻의 소그드어 록산느(roxanne) 혹은 록산나(roxana)를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는 일본학자도 있지만, 기실 ‘사자’라는 뜻의 투르크어 arslan의 음차자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아슬란이 사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요즘 사자를 등장시켜 광고하는 우리나라 자동차 이름도 아슬란이다. 안록산이 고향 안국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그가 속한 부족의 지도자 카파간 카간(可汗)이 716년 사망하면서 일족들이 혼란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史思明(703~761) 역시 서역인으로 중앙아시아(당시 소그디아나, 이웃한 페르시아인들은 ‘Tur의 땅’이라는 의미로 ‘Turan’이라고 부름) 史國 출신이다. 본래의 이름은 警干이었는데, 현종이 思明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사사명 역시 서역인답게 외국어에 능통해 6개 국어를 구사했다. 현재 사마르칸드 남쪽 80㎞ 지점에 위치한 도시 샤흐리사브즈(Shahr-i-sabz)가 과거 史國이다. 이 도시의 페르시아어 말뜻은 ‘녹색의 도시(green or verdurous city)’다. 이곳에서 티무르(1336~1405)가 태어났다. 기원전 6~4세기에는 페르시아 아케메니드(Akhemenid) 제국의 일부였다.


사실 안록산의 성씨에 관한 기록들은 安과 康으로 서로 엇갈린다. 강 또는 안 어느 쪽이든 안록산이 소그드 출신인 것은 분명하지만, 안록산의 친부는 康씨이고 계부가 安연언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록산과 사사명 일가는 당시 서역인 소그디아나로부터 이주한 집단이다. 사람들의 거처가 바뀌게 되는 건 전쟁의 결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장사의 목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소그드인은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줄여서 興胡라고 불리는 興生胡商, 즉 상업에 종사하는 胡人들이 바로 소그드인이다.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입에는 석청(꿀)을 먹이고 손바닥에는 아교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꿀처럼 달콤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한 번 수중에 들어온 재물은 놓치지 말라는 의미에서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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