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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미디어화, 미디어의 정당화
정치인의 미디어화, 미디어의 정당화
  • 교수신문
  • 승인 2014.11.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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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이연도 서평위원
병영독서특강으로 인연을 맺었던 친구가 지난해 제대한 후 국회에서 일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친구가 가끔‘여의도통신’이란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는데, 이번 달은 국정감사가 마무리되는 때여서 그 소회를 담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국정감사 기간, 국회 보좌진들은 그간 준비한 소재들이 얼마나 언론의 주목을 받는지를 가장 큰 관심사로 둡니다. 방송매체에 최소한 두 번 이상 보도돼야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구요. 그렇다면 저는 올해 평타는 친 셈입니다.”언론에 잊혀진 정치인보다는 醜聞이라도 보도가 되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듯, 정치인들이 미디어에 갖는 집착은 대단하다. 국회의원들이 국감에서 온갖 소품이나 동물 등을 동원하는 것도, 언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다. 올해 국감에서도‘괴물쥐’뉴트리아, 산양삼, 치약, 소방복 등 다양한 소품들이 등장했다. 정치의 포퓰리즘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정치와 미디어는 현대사회에서 이미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와 미디어의 관계가 우려스러운 것은, 양자의 구분이 눈에 띄게 모호해졌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정치가 미디어를 주도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전자가 후자의 식민지로 변화해가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8월 출간된 『탈정치시대의 정치』(왕후이 지음, 성근제 외 옮김, 돌베개 刊)는 정치가 미디어화되는 현상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사회주의 중국의 상황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 내용적 맥락은 한국의 현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정치인이 대중에 영합하는 발언을 일삼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 언어가 미디어의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긴 안목으로 시행해야 할 정책을,‘ 보기 좋은’사진을 찍기 위해 졸속으로 처리하는 일도 이 때문이다. 한미FTA가 한미 정상회담의 후광을 위해 체결됐 듯이, 한중FTA 역시 그와 똑같은 과정으로 진행됐다. 미디어와 정당이 벌이는 게임은 대개 안정과 大局 혹은 경제활성화 등을 명목으로 내세우지만, 그 실질은 공공의 필요를 빙자한 利權나눠갖기에 가깝다. 정당과 미디어는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일체화돼 있다는 왕후이의 지적은 그 점에서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제 미디어는 政黨化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력을 길러낸 정당은 자기들 사이의 경쟁 게임으로 시민의 언론자유와 정치적 토론을 대체하거나 은폐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그동안 야당을 포함한 정치인들과 언론의 행태를 되짚어보면, 이 말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현대 정치의 주축을 이루는 정당이 자신의 대표성을 상실하고, 미디어에 종속된 현실은 심각한 정치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정치는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다. 정치활동은 시민사회의 능동적 주체가 행하는 것으로, 정치와 주도권 문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의제 민주제를 시행하는 현실에서 정당은 그 주도권을 쥔 집단이다. 그람시가 말한 대로, “현대에 새로운『군주론』을 쓴다면, 그 주인공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의 정당이 될 수 밖에 없다.”(『옥중수고』) 행위주체의 능동성에 대한 정치의 의존과 정치행위의 조직화는 역사에서 늘 협력과 충돌을 반복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현 사회의 정치적 위기는, 정치의 주도권을 쥔 정당과 능동적 주체로서의 시민이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정당은 더 이상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특수한 이익집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본래 사회의 서로 다른 이익과 의지를 체현하고 조화시키던 정당 정치가, 어느 순간 분열된 국가 관계 속에서 어느 한 편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다.

정당과 미디어 간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정당이 광고주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디어의 생리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시장사회의 이익관계에 깊이 빠져든 정당을 어떤 역량이나 기제로 제어할 수 있겠는가. 정당의 보편적 대표성은 그 정치적 가치를 통해 완성되는데, 정당의 미디어화는 정당의 이러한 가치를 약화시키거나 변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정치개혁 방식을 둘러싼 주장은 보수와 진보 모두 정당정치의 회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보수는 여전히 고전적 의회정치에 기반해 내각제 개헌 등을 통해 정당정치를 보완하려 하고, 진보는 정당의 정치적 대표성 회복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전제로 이야기하면, 후자의 문제의식이 훨씬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다만, 진보정당이 그 존재감을 상실하고, 정치지형이 모두 보수로 재편된 우리 현실에서 정당의 대표성 재건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에 대한 뚜렷한 답은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시민사회의 역량을 좀더 직접적으로 정치적 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방향만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가 국가와 미디어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직접적 정치참여를 활성화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정치적 활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원천이다.

정당과 계급, 국가, 현대정치의 주체들이 모두 탈정치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찾아내는 것은 곧 정치 영역을 다시 정의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탈정치화’의 핵심이 정치적 가치의 폐지와 후퇴라면, ‘재정치화’가 가야 할 길은 그 가치의 재건과 우리의 정치적 삶을 활성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표면적‘정치 과잉’의 시대,‘ 정치적 허기’를 견디는 지식인의 책무가 무겁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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