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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책들이 전하는 실패의 이야기
(인)문학 책들이 전하는 실패의 이야기
  •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 승인 2014.11.0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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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 최성만 서평위원
오늘 약간 특이한 주제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써 볼까 한다. 최근 젊은 나이에 돌아오지 않을 먼 여행을 떠난 한 음악인(신해철)의 소식을 접한 것이 그 계기다. 그의 삶은 예술, 정치, 대중, 열정의 연관을 생각게 한다. 이 소식을 접하고 내가 한 지인과 나눈 문자는 이렇게 끝났다. “음악은 남겠지만 젊은 나이라 너무 아까워요. 정말 살고 죽는 게 다 뭔지.”(지인) -“ 네. 반항적 인간은 불같이 살다 가는가 봐요. 물론 모방할 건 아니지만요.”-“ 네. 이 세상이 더럽고 치사해서 버렸나 봐요.” 이 지인은 10대에 자신의 반항심의 8할을 그에게서 배웠다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로, 나와 비슷한 반항적 인간이다. 평소 정치적 성격의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신해철의 이미지를 그리던 나의 머릿속에는 여러 기억의 파편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어졌다.

오늘날 인류 역사는 200여 년 전 시작한 현대화 과정의 끝자락에 와 있다. 현대화 과정은 인류에게 엄청난 진보와 풍요를 가져다줬지만, 다른 한편 언제 끝날지 모를 긴장과 경쟁과 총체적 난국의 삶도 함께 가져왔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 이론가가‘피로사회’라고 특징지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성공에 목말라 하고, 다른 한편 끊임없이 실패를 두려워하며 또 실제로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극히 보기 드문 성공신화와 보기 흔한 실패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대중매체는 대개 성공신화로 대중을 채찍질한다. 반면 실패 이야기는 보편적인데도 대개 기피되고 묻히고 억압된다. 실패 이야기들도 대부분‘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메시지로 전달된다.

스티브 잡스도 그의 유명한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죽음과 실패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담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것은‘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상투적 메시지를 전하면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서다. 그밖에도 그의 축사는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한다. 체게바라는 자신이 실패할 거라는 것, 그럼에도 그 길을 계속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글턴이나 지젝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토해낸 절규를 천착한다. —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예수는 실패함으로써 이룬다. 무릇 사람들의 인생 전체는 그 인생의 마지막 단계와 순간에서만 제대로 재구성될 수 있다. 그래서 끝까지 살아봐야 한다. 우리는 어떤 개인의 삶을 두고 성공한 삶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다.

그런데 매체의 영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고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고 극화한다. 반면에 빈곤과 실패의 경험을 고백하는 사람은 드물다. 모범적이라고 알려진 삶을 산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실은 한 사람의 일생을 조명할 때에는 그 사람의 빛과 어둠, 심지어 희극적인 면까지 보여줘야 한다. 일례로『찰스 다윈 평전』의 저자들은 다윈의 그런 희극적 면까지 보여준다. 그에 비해 한국에는 한 사람의 전기를 이야기할 때 현재의 성공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전기들이 대부분이다.‘ 삽질’했던 역사는 감춘다.

실패의 정치학을 보여준 사람들 당사자에게는 정작 자신의 삶이 실패한 삶이냐 성공한 삶이냐는 판단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시급함이 과거를 판단할 여유가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실패 이야기는 死後에 후세에 의해 구성된다. 奧地를 탐험했던 사람들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정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들은 종국에 실패했지만, 실패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전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이런 실패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인류의 문명은 구축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렇게 실패한 자들, 이름 없는 자들의 노역, 용기로 무언가를 이룬 자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 또한 세속적 기준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그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그러한 성공마저 언제든 철회될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패가 일반적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 실패에서(자신은 이런 어리석은 실패를 피해야겠다는) 교훈을 얻거나 (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자 하며, 나아가 그 실패에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패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실패가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는 믿음을 키워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실패는 주어진 것에 안주하거나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사람들이 쉽게 도전하지 않는 그 어려운 것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게!) 추구했다는 것을 증언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실패 이야기는 그런 희망과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실패는 단순히 불행이 아니고, 또한 불행하다는 것이 실패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 아니 인문학 전체는 세상사와 삶에 대해 실용학문 못지않게 많은 지혜와 지식을 전해주긴 한다. 하지만 명쾌한 해답을 주기보다 씁쓸한 통찰과 질문거리를 주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인)문학 책들이 전하는 실패 이야기는 세상과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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