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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속에 黃河가 있었다! … 설산의 눈 녹은 물 끌어오는 인공수로의 壯觀
사막 속에 黃河가 있었다! … 설산의 눈 녹은 물 끌어오는 인공수로의 壯觀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10.28 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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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4. 축복의 땅 투루판― 포도·카레즈·베제클리크 천불동

 

▲ 고창고성 사진권오형

카레즈(인공수로)가 없다면 투루판에는 사람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롭노르(호수)가 메마르며 주변지역이 사막화되자 누란왕국이 역사의저편으로 사라졌듯, 투루판도 진즉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카레즈덕분에 투루판은 포도의 고향이 됐고, 분수대가 물을 내뿜는다.

“낮에는 모래를 먹고, 밤에는 모래를 덮고 잔다.”―위구르 속담
투루판에 가면 만사 제쳐놓고 건포도를 먹어야 한다. 물론 배탈 나지 않을 정도로. 투루판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10㎞ 가량 떨어진 곳에 포도구가 있다. 화염산 서쪽 기슭에 남북 6㎞ 길이, 최대 폭 2㎞ 너비로 자리한 아주 넓은 지역이다. 8월에 포도 수확을 한다. 포도 재배 농가나 길가의 포도 가게 근처에만 이르러도 향긋한 포도 냄새가 난다. 건조대나 대형 바구니에 가득 담긴 형형색색의 포도가 미각을 자극한다. 포도주도 있다. 우리 일행은 한 농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의 안내로 마당 한 귀퉁이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카레즈(kharez, 지하수로)를 둘러보고 오느라 모두들 더위에 지쳐 있었다. “쭈쭈바가 먹고 싶어.” 누군가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보석바”, “나는 메론바.” 각자의 취향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메아리는 공허하다. 쭈쭈바도 보석바도 메론바도 나올 리 없다. 대신 몇 가지 종류의 건포도가 나왔다. 맛보기는 공짜니까 열심히 먹다가 너무 달아서인지 슬그머니 손이 상 아래로 내려들 간다. 단 걸 좋아하는 나만 부지런히 건포도를 즐겼다.


누군가로부터 대접만 받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상술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 어머니 같은 노인들이 건강보조식품 판매 전문가들(?)의 친절한 말투와 화장지 따위의 공짜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호주머니를 터는 심정과 마찬가지. 우리도 건포도를 사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지갑을 열었다. 기왕에 최상의 것을 사리라. 400년 묵은 포도나무에서 수확해 건조했다는 ‘왕중왕’, 빛깔이 매력적인 ‘흑진주’, 나무에서 자연 건조한 ‘수상건’, 이름도 멋진 ‘여인향’ 등 별별 이름의 건포도를 미련 없이 구입했다.
건조지대의 특산 여름 과일로는 하미과(멜론)와 수박, 그리고 포도를 꼽는다. 포도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포도는 서양에서도 인간의 삶만큼이나 오래된 과실이다. 로마의 주신 박쿠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그리스 문명에서는 디오니소스로 나타나는 이 행복한 신은 술을 마시고 엑스터시 상태, 망아의 지경에 놓인다. 예술 탄생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이태백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건조지대 투루판에 포도가 유입된 것은 가히 신의 선물이라 할 만하다. 한나라, 위나라 때의 역사 기록에 포도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 재배 역사가 2천년이 넘었다. 포도의 원산지는 이집트와 페르시아로 추정된다. 그리고 투루판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래됐을 것이다. 언제일까. 흉노에 밀린 월지연맹의 구성원인 ‘옥의 부족’ 카시 (혹은 쿠스)가 현재의 교하고성을 중심으로 거사국(師國) 또는 姑師國을 세웠음을 우리는 안다. 월지의 한 갈래였던 거사국은 5세기 중엽 흉노계의 저거씨(沮渠氏)에 의해 멸망한다. 그리고 저거씨 세력은 교하교성 동편, 오늘날의 고창고성 자리에 고창국을 세운다. 그러다 6세기 초 한족 출신의 국씨가 고창국을 접수했다가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 무렵 포도는 이 지역 최고 특산물이 됐다. 연평균 강수량이 16㎜에 불과한 고온건조한 분지의 메마른 땅과 강렬한 햇볕, 극심한 일교차가 길러낸 투루판 포도는 당도가 무척 높아 웬만큼 단 걸 좋아하는 사람도 한 송이만 먹으면, 건포도는 한 움큼만 먹으면 머리가 아프다 할 정도다. 씹는 맛은 단연 최고다.
‘포도’라는 한자어는 고대 페르시아어 ‘budawa’의 음역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현대 페르시아어는 ‘angur’다. 이 말은 말레이시아어, 우르두어, 힌디어에도 비슷한 음가로 남아 있다. 타지크족이 중심이 된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 사람들도 포도를 ‘앙구르(angur)’라고 한다. 한편 이웃한 나라 혹은 민족들은 ‘우줌(uzum)’ 또는 이 말의 변이형을 사용한다. 왜일까. 타지크인은 이란계 주민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6~8세기 몽골초원에서 중앙아시아와 흑해 일대까지의 드넓은 지역을 석권했던 대 돌궐제국, 그 이후 셀주크 투르크 제국, 우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향으로 중앙 유라시아 제국에는 돌궐의 후예들이 곳곳에 퍼져있다. 이 때문에 9세기 중엽 이후 투르판을 위시한 타림분지의 주인공이 된 위구르를 포함한 돌궐의 후손들은 포도를 같은 말로 지칭한다. 카자흐도, 키르기즈도, 우즈베크도, 타타르도, 몽골도, 바쉬키르도, 칼묵도, 터키는 물론 아제르바이잔도 그렇다. 몽골도 제국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는 돌궐의 한 지파에 불과했다.

한편, 포도 재배의 역사가 6천년이 넘는 코카서스 지역의 그루지야(Georgia) 사람들은 포도를 ‘qurdznis’라고 한다. 이웃한 동편의 아제르바이잔과 아나톨리아 반도의 터키 사람들이 돌궐어인 ‘uzum’을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거친 세상, 외부로부터의 침탈과 그로 인한 문명의 혼종 속에서도 어쩌면 토박이 종족의 문화적 주체성을 간직한 때문인지 모른다. 그루지야 지역은 고대에는 이베리아(Iberia)라 불렸다. ‘이베르인(Iber)의 땅’이라는 뜻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포함한 지역 역시 이베리아라고 부르는데 무슨 연고가 있지 싶다. 이렇듯 역사 연구에는 언어적 지식이 도움이 된다.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한 코카서스 지역의 이베리아 남쪽에는 메디아 왕국의 페르시아가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강수량의 절대 부족이라는 극도로 불리한 자연환경 속에서 투르판 주민들은 어떻게 물 부족을 해결하고 포도 경작에 성공했을까. 지구상에서 가장 뜨겁다는 화염산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위구르어로는 ‘키질탁(Kyzyl-tag)’, 즉 ‘홍산’이란 뜻이다. 한여름 이곳의 지표 온도는 섭씨 80도를 웃돈다. 화염이라는 말에서 짐작하듯 물이나 물에서 생명을 부여받는 수목과는 거리가 먼 산이다. 오죽하면 삼장법사 일행이 파초선의 위력을 빌려야 했을까.

▲ 난 가게 주인과 가게 밖 젊은 위구르 여인의 묘한 앙상블.

자연의 도전에 인간은 응전한다. 천산 이남 타림분지 내의 모든 오아시스 도시가 그렇듯 투루판도 생존을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약 100㎞ 정도 떨어진 천산의 물을 끌어왔다. 천산에는 해마다 9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3~4월까지 계속된다. 이 눈이 녹지 않고 쌓여 만년설을 이룬다. 해빙의 봄이 되고 무더운 여름이 되면 만년설이 녹아 생명수가 된다. 물이 있는 곳을 안 사람들은 이 물을 투루판까지 끌어오기로 마음먹는다. 비장한 결의와 불굴의 끈기로 사람들은 천산부터 자신들의 거주처까지 지하 수로를 판다. 설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오기 위한 인공수로를 ‘카레즈(kharez)’라고 한다.


카레즈는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로 인한 물의 증발을 최소화하고, 풍사로 인한 수로의 막힘을 방지하기 위해 땅 속에 물길을 낸다. 마냥 지하 물길만 낼 수 없으니 사람들은 적당한 지점에서 땅 위로 구멍을 낸다. 그래야 수로 정비를 위해 사람들이 들락날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설과 보소작업을 하지 않으면 수로는 이내 막힐 수밖에 없다. 이런 지혜, 자연과의 싸움에서의 인간 승리는 투루판 이전 페르시아 사막 지역에서 먼저 있었다.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그들의 노하우가 투루판 주민들에게 전해졌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아마 이슬람교의 전파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카레즈가 없다면 투루판에는 사람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 롭노르(호수)가 메마르며 주변 지역이 사막화되자 누란왕국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듯, 투루판도 진즉 운명을 달리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천산으로부터 불의 도시 화주까지 물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카레즈는 지표면에서 대략 30m 아래 지점에 있으며, 수로 수는 대충 1천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총연장 5천㎞가 넘는다니 길이가 황하와 맞먹는다. 카레즈 덕분에 투루판은 포도의 고향이 됐고, 도시의 밤 곳곳에서 분수대가 아낌없이 물을 내뿜는다.


쿠차에 키질 천불동이 있다면, 여기 투루판에는 베제클리크 천불동이 있다. 이 석굴사원군은 국씨 고창국시대부터 위구르 왕국 시대에 걸쳐 조성됐다. ‘아름답게 장식한 장소(베제클리크)’라는 이름을 통해 짐작하듯 석굴 벽면마다 화려한 불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11세기 초 이슬람의 서역 침공으로 대부분 훼손됐다. 또한 20세기 초 동양문명에 광신적으로 심취한 서양의 약탈자들에 의해 남은 것 거의 모두가 망실됐다. 이런 문명 파괴와 약탈은 어떤 명분으로도 있지 않아야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한다. 반달족이 그 선두주자라고 해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도, 나폴레옹의 군대도, 이슬람군도, 성지 회복에 나선 하나님의 군대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와 미국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천불동 사원 건립에는 위구르 왕족과 귀족들도 참여했음을 불교 벽화가 보여준다. 이로 미뤄 위구르인들이 이슬람 이전에는 열렬한 불교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서방의 카라한 왕조가 침입하며 억지 개종해 오늘날 이슬람 위구르가 된 것이다. 칭기즈칸이 제국을 세우기 전 위구르 왕의 칭호가 이디쿠트(Idiqut)였던 점도 불교왕국 위구르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디쿠트’는 ‘축복’이라는 뜻의 말이다.
9세기 중엽 돌궐의 한 갈래였던 위구르인들이 투루판 분지에 오기 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키르기즈에 밀려 본거지 몽골초원을 벗어난 유목집단 위구르가 감숙에서 천산까지, 그리고 타림분지 오아시스 지역에 정착하기 전 투루판 분지에는 나름의 굴곡진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기원전 2세기 경 거사전국(혹은 거사전왕정)과 거사후국(혹은 거사후왕정)이 오늘날의 교하고성을 중심으로 투루판 분지를 장악했다. 이들 거사족, 즉 옥의 부족은 흉노에 쫓겨 본거지 감숙과 돈황을 떠난 월지의 지파인 것으로 의심된다. 거사국은 4세기 중반까지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았다.
중원에서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위진남북조 시대가 시작된 4세기 후반 탁발선비의 나라 북위(386~534년)와의 싸움에서 패한 흉노계 국가 북량(397~439년)의 저거무휘와 저거안주 형제가 서쪽으로 도주해 오늘날의 고창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이들이 떠나온 감숙성은 오호십육국 시대에 이르러 한인계 왕조 전량(313~376년)이 지배하고 있었다. 327년 전량은 투루판 분지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서 한어가 사용되고 유교문화가 널리 보급된다. 이어서 티베트계의 디족(族) 부견 가문이 건립한 前秦(351~394년)이 감숙 일대를 장악하고 동계인 여광을 서역정벌군 장수로 세워 언기와 쿠차를 정복하게 한다. 후일 여광은 자립해 감숙에 후량(386~403년)을 세운다. 모두 단명한 왕조들이다.


후량이 기울 무렵(397년) 흉노계 노수호족(盧水胡族) 출신의 무장 저거몽손(沮渠蒙遜)이 張掖 일대의 감숙을 차지하고 段業을 왕으로 추대한다. 北(397~439년)의 탄생이다. 영웅호걸들의 기개가 참으로 대단하던 시절이었다. 후량의 무장이었던 저거몽손은 사촌지간인 저거남성(沮渠男成)과 힘을 합쳐 建康의 태수 단업을 建康公으로 추대했으며 저거몽손은 장액태수, 저거남성은 보국장군이 됐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저거몽손은 서진과 맞서기 위해 夏, 北魏와 연합하는 한편 東晉, 宋에도 복종해 凉州刺史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431년 서진과 하가 멸망하고 북위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북위에 인질을 보내고 凉王으로 임명됐다. 433년 저거몽손이 병사하고 아들 저거목건(沮渠牧)이 뒤를 이었다. 저거목건은 하서왕을 자칭하고 文治를 펼쳤으나, 439년 선비족이 세운 나라 북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북량의 멸망으로 마침내 오호십육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북량 멸망 후, 목건의 동생 저거무휘(沮渠無諱)가 동생 저거안주와 더불어 酒泉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북위에 패해 서쪽으로 달아나 투루판 분지의 고창에 자리를 잡았다. 송은 저거무휘를 河西王으로 봉한다. 동생 저거안주는 448년 교주를 쟁취하고 거사전국을 포함한 투루판 분지 일대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고창국은 이렇게 탄생한다. 흉노계 정권 고창국이 들어서며 거사전국은 종말을 고하고 이에 따라 월지부족 거사인들은 서쪽의 언기로 이주한다.


450년 고창국왕이 된 저거안주는 460년 초원의 새로운 실세 柔然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고 저거씨 고창국은 결국 2대 만에 멸망했다. 이어서 유연을 배경으로 한 한족의 괴뢰정권 감백주 정권이 수립됐다. 감씨 정권은 초원의 유목집단 고차와 에프탈의 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491년 붕괴된다. 이에 고차는 돈황 출신의 장맹명을 고창왕으로 세운다. 그런데 장맹명의 뒤를 이은 마유가 북위와 친하고자 내통을 꾀하자 그를 살해하고 500년 경 국가라는 인물을 내세워 왕으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초원 부족 고차에 의한 국씨 고창국이 성립된다. 비록 왕은 국씨가 계승하지만 국가 운영에는 장씨 등 한인 명족이 참여했다.


460년 초원세력에 의해 수립된 한족의 국가 고창은 그후 640년까지 180년 동안 무탈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유목세력과 중원의 압력 하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552년 유연의 대장장이 역할을 하던 돌궐이 주인을 격파하고 초원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극하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돌궐은 카간의 딸을 고창왕 국보무에게 시집보내며 그에게 ‘일테베르(Il Teber)’라는 돌궐 고유의 칭호를 부여한다. 거창한 이름이 뭐 대수인가. 돌궐의 흑심은 혼인동맹으로 투르판 분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데 있었다. 동서 교역로의 거점을 장악해 통상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을 것이다.


7세기 전반에는 북방 초원의 서돌궐이 타림 분지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중에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무너뜨리고 타림 동쪽의 하미 일대를 장악하자 당의 진출을 두려워한 고창의 마지막 왕 국문태는 서돌궐의 통야구브 카간과 연대를 꾀했다. 이 무렵 삼장법사 현장이 구법길에 고창국을 지나다 국왕 국문태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국문태는 서돌궐로부터 일테베르라는 칭호를 받고 자신의 누이를 통야구브 카간에게 시집을 보낸다. 이렇듯 여자는 흔히 외교적 선물로 이용됐다. 그러나 국문태의 노력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고창국은 당의 원정군 앞에 무릎을 꿇는다. 640년의 일이다.


당은 고창을 서주로 개명하고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한다. 군대를 상주시켰음은 물론이다. 당의 타림분지 지배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이후 8세기 후반 이후 안록산의 난 등 당이 휘청거릴 때 당시 몽골의 지배자이던 위구르가 위협적 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천산과 타림분지의 지배세력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9세기 중반 키르기즈에게 쫓겨 몽골초원을 벗어나면서부터다. 도대체 위구르는 누구인가. 위구르는 回紇이라 기록됐다. 이슬람교를 회교, 회회교라 부르는 것은 이 종교가 위구르 즉 회흘인들을 통해 중국에 전파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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