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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풍경 : 퇴임·작고 교수들 장서 기증
이색풍경 : 퇴임·작고 교수들 장서 기증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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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11:14:48
퇴임교수들의 장서기증이 늘고 있다. 각 대학도서관은 정든 연구실을 떠나는 노교수들의 유산 덕분에 날로 튼실해지고 있다. 도서관 기증 담당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절반 정도의 교수들이 퇴임이나 연구실을 이전할 때 도서관에 수백권에서 수천권의 책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 학내 연구자들은 국회도서관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희귀자료를 ‘안방’에서 확보하는 행운에 당첨되기도 한다.

퇴임교수 장서 기증은 후학을 위한 선학의 학문적 지원이지만, 근래에 와서는 몇가지 배경도 고려해볼 수 있다. 소장하고 독점하는 것에서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도서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정년 연령이 낮아져 퇴임 후 연구를 계속하는 교수들도 많지만, 연구에 직접 관련되지 않는 책들은 공동재산으로 환원하려는 의식이 강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도서관의 장서확보 운동·기증 운동도 이런 문화를 이끌고 있다. 교수들의 주거형태가 저택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책 보관공간이 좁아진 것도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울면서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서려있는 셈이다.

기증된 도서가 모두 새로운 서가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외서나 희귀본, 비싼 의학서적이나 漢籍 등은 수서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상당수의 국내서들은 複本 조사 과정에서 떨려나간다. 이렇게 도서관 입성에 실패한 책들은 창고에 쌓여졌다가 타 도서관행에 오르거나 아니면 폐기처분된다. 그냥 버려지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한 사서는 “웬만한 국공립도서관은 교수들 장서가 원서 위주이고, 손때 탄 낡은 책이라고 거절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자 형태가 아닌 많은 자료들은 개인서고 설립에 포함될 때를 제외하고는 접수 불가다.

기증 도서 가운데 양서 비율이 빈약한 경우도 문제다. 경희대 도서관 사서과 곽주원씨는 “1천권을 기증 받았는데, 목록에 올린 책이 50여권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라고 털어놓는다. 이는 장서 기증이 아니라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가깝지만, 꽤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화여대의 경우 기증도서의 80% 이상을 소장한다. 책의 수준이 대체로 높고, 기존 소장도서와 겹치는 경우도 닳아서 못쓰는 책들의 교체용으로 수서해둔다. 작고교수의 장서는 거의 대부분 내용이 훌륭하다. 연세대 도서관 이호균씨는 지난해 타계한 고 최종욱 국민대 교수(철학)를 일례로 들면서 “4천5백여권을 기증했는데, 독일철학 원서를 비롯해 값나가는 동서양 철학전적들이 많았다”라고 전한다.

학교에 따라서는 교수들이 개인서고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한다. 최근 한림대도서관은 모 교수의 개인서고 요청 때문에 타 대학 도서관에 빈공간이 없냐는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이 성사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리 권수가 많아도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한 학자가 평생 동안 구축한 지식의 지도는 얼마간 형태를 유지하다가 분산되는 아픈 운명을 겪는다.

기증 도서가 도서관 장서유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다. 경희대의 경우 지난해 1년 동안 입수된 도서 3만1천여권 가운데 기증도서가 6천5백여권으로 20%를 웃돈다. 이 중 교수들의 책은 절반 가까운 3천여권 정도다. 복본검색을 거친 뒤의 통계이기 때문에 실제 기증권수는 3~4배로 볼 수 있다. 대학도서관 가운데 퇴임교수 기증장서 유치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서울대, 한국해양대, 부산대 등이다. 서울대도서관은 퇴임을 앞둔 교수들에게 일일이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하는데, 대부분 교수들이 많든 적든 이에 응한다고 한다.

하지만 퇴임 교수의 장서를 대학도서관에서 독점하는 현 구조에는 문제점도 많다. 공간은 없는데, 책이 자꾸 늘어나니 말이다. 낡고, 소용이 덜한 책이라도 필요한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전국적 네트워크를 시급히 구성해야할 것으로 여겨진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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