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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카리스마의 여장부와 버림받은 비극의 여왕
강한 카리스마의 여장부와 버림받은 비극의 여왕
  • 권미란 부산외대·스페인어과
  • 승인 2014.10.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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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25_ 스페인 왕가의 여인들

▲ ‘광녀 후아나’는 사망한 남편의 매장을 오랫동안 거부했다. 남편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여러 수도원을 전전하면서 펠리페의 부활을 기원했다. 그림 속에서 수녀 복장을 한 후아나 여왕은 잠시도 남편의 관을 떠나지 않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스

현재 스페인 국영TV는 작년 후반기를 포함해 올해 9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황금시간대에 국민의 마음속 영웅으로 추대 받고 있는 까스띠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1451~1504)의 인생과정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역사드라마를 시리즈로 방영하고 있다. 여왕의 공식 명칭은 ‘이사벨 가톨릭 여왕(Reina Isabel la Cat?lica)’이다. 그녀는 권력이양이 남성중심으로 이뤄지고, 지역귀족 세력을 장악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저돌적인 도전정신으로 강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스페인을 통합으로 이끌었던 여장부이다.


당시 스페인은 까스띠야, 나바라, 아라곤, 그라나다 등 여러 왕국들로 분열돼 있었다. 까스띠야 왕국의 왕위를 놓고 이사벨 공주는 이복오빠 엔리께 4세(Enrique IV)와 절박하게 투쟁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웃 왕국 아라곤의 계승자인 페르난도 왕자와 사촌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으로부터의 허락을 받아 정략결혼을 한다. 이사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두 왕국의 연합을 이루는 동시에, 아라곤 왕국을 정치적 동맹자로 만들었다. 하나가 된 연합왕국은 군사적인 힘을 내세워 ‘국토회복운동(레꽁끼스따)’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스페인지역을 지칭하던 라틴어 ‘히스빠니아(Hispania)’는 오늘날 사용하는 ‘에스빠냐(España)’로 변천해 아라곤과 까스띠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는 용어가 됐다. 한편,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속히 되찾아주길 염원하는 의미에서 연합왕국의 군주들에게 ‘가톨릭 왕들(Reyes Católicos)’이란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각각 ‘이사벨 가톨릭 여왕(Isabel la Católica)’, ‘페르난도 가톨릭 왕(Fernando el Católico)’으로 부르게 된다.

자식보다는 국익을 내세운 ‘결혼동맹’
스페인에 있어 1492년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의 중요한 해였다. 우선 까스띠야-아라곤 왕국이 그라나다의 이슬람 왕국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축출함과 더불어 레꽁끼스따를 마무리하면서 하나의 스페인으로 완전하게 통합시켰다. 진정한 국가의 통합은 정치적·종교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굳게 믿던 이사벨 여왕은 재정복의 여세를 몰아 가톨릭의 힘을 더욱 상승시키고자 했다. 종교에 대한 무관용의 원칙을 지속적으로 적용시켜 이교도들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종교재판소’를 통해 가톨릭 순혈주의를 강조했고 유태인추방령을 공포했다. 이제 스페인은 명실공히 가톨릭을 상징하는 국가 반열에 올라섰다.


중세의 유럽은 왕가간의 결혼으로 왕국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려는 강한 의지가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이사벨 여왕이 르네상스에 입문하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던 무렵, 유럽 왕가들은 프랑스 샤를 8세의 대외적인 행보에 관심과 견제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력균형’이란 명분하에 일정한 국가가 월등한 국력을 갖는 것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지중해에서의 활동 영역을 넓히려고 각축을 벌였다. ‘가톨릭 왕들’ 역시 철저하게 정치적, 외교적 계산속에 프랑스를 제외한 주변 국가들과 ‘결혼동맹’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외교전을 펼치는데 뛰어 들었다.


‘가톨릭 왕들’ 부부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5명의 자식들이 국가의 큰 자산이자 정치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톨릭 왕들’ 본인들도 역시 ‘결혼동맹’으로 국가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운명을 선택했듯이, 자식들의 미래를 담보로 앞으로 다가올 파격적인 성과물을 기대하며 외교 전략을 마련했다. 자식 교육에서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익을 강조하며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특히 이사벨 여왕은 딸들에게 “우리는 여왕이 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치는 허락될 수 없다”라고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주문함으로써 ‘군주는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임을 강조했다.

▲ 콜롬버스가 지나간 4개의 아메리카 경로. 콜롬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사업성을 타진하기 위해 3번이나 더 다른 경로를 통해 재탐험을 했다.

결국 국가전략에 따라 스페인 연합왕국의 장남인 후안(Juan)과 차녀 후아나는 신성로마제국의 마르가리트 공주(Margarita de Austria), 펠리페 왕자와 각각 인연을 맺어 합스부르크 왕가와 겹사돈 관계가 됐다. 장녀 이사벨과 삼녀 마리아는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부인으로, 사녀 까딸리나는 영국의 엔리케 8세의 부인으로 결혼시켰다. 이처럼 ‘결혼동맹’ 전략을 국가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행동에 옮기면서 스페인은 주변 유럽 국가들의 견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미래가 약속된 다복한 스페인 왕실이었지만, 태어난 후손들은 하나같이 불운의 징크스를 지녔던 모양이다. 전략적으로 결혼한 왕손들은 비명횡사하거나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이사벨 여왕의 마음은 자식들의 불행을 지켜보는 내내 안타까움의 연속이었고 그녀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갓 결혼한 후안의 죽음과 왕세자비의 복중 태아유산, 장녀 이사벨의 난산과 사망, 상속자 어린 손자 미겔(Miguel)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애초 유럽에서 까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확고한 입지를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 스페인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504년 이사벨 여왕의 죽음으로 이제 까스띠야 왕국의 계승권은 8년 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남에게 시집간 후아나 공주에게 넘어갔다.

스페인 왕실의 비애와 ‘광녀 후아나’ 여왕
후아나가 16세가 될 무렵, 아직 소녀의 모습이 가시지 않은 시기, 그녀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오늘날 벨기에 지역에 해당하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정략결혼을 위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후아나 공주는 1천500여 명의 수행원과 120척의 선박들을 대동해 대외적으로 스페인 왕실의 위세를 과시했다. 자신이 태어난 스페인과 정서적·문화적으로 다른 외딴 곳에서 후아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오로지 남편인 펠리페만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려는 펠리페의 불륜과 배신감이었다. 이때부터 남편에 대한 집착 증세를 보이게 된 까스띠야 왕국의 상속녀는 ‘광녀 후아나(Juana la Loca)’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남편에 대한 애증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광녀 후아나’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주변의 걱정과 우려를 자아냈다. 급기야 그녀는 까스띠야 왕국의 여왕으로서의 칭호를 소유하면서도 실질적인 통치권을 박탈당한다. 정신이 오락가락해 구제불능의 정신 이상자로 내몰린 후아나 1세(1479~1555)였지만, 그녀의 존재는 스페인의 통합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진정 그녀가 받고 싶어 했던 것은 가족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이었지만, 페르난도 아라곤 왕국의 국왕인 아버지와 스페인 제국의 까를로스 1세인 아들은 후아나 여왕의 바람을 저버린 채 그녀를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또르데시야스(Tordesillas)성에 34년간 감금시켰다.

후아나가 까스띠야 왕국의 새로운 후계자임을 선포하기 위해 스페인에 머문 여러 해 동안 아들 까를로스는 플랑드로에서 독일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가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까를로스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후아나를 스페인 상속을 위한 도구로 여겼는지 모자간의 만남을 단 한차례로 끝내고 말았다. 아들은 유폐된 어머니와의 이 일회적 만남을 ‘광녀 후아나’의 상속자로서의 자기 위상이란 의미로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한편 까스띠야의 귀족들과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非情을 보여줬다.


유럽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슬픈 사연의 주인공, ‘광녀 후아나’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까스띠야의 주민들은 매정한 현실에서 남편, 아버지, 아들로부터 속수무책으로 버림받으며 전략적 이용만을 당하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세상을 등진 자신들의 여왕 후아나 1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추모했다는 일화는 모두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권미란 부산외대·스페인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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