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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적 논쟁 넘어서기 위한 제3의 광장”
“당파적 논쟁 넘어서기 위한 제3의 광장”
  • 교수신문
  • 승인 2014.10.2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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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 강정인 지음| 아카넷| 432쪽| 20,000원

어떤 점에서 이 책은 한국정치사상을 하는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정치사상을 하는 이유는 좋은 정치를 위해서다.
정치사상의 궁극적 관심은 바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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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정치사상사를 본격적으로 조망한 학술연구서가 나왔다. 강정인 서강대 교수의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아카넷)가 그 책이다. 이 책은 한국 현대 정치사상사를 이해하는 기본 개념으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동시성의 비동시성(simultaneity of the non-simultaneity)’을 제시하고 있다. 블로흐는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과 봉건유제의 잔존, 그리고 양자의 불일치로 인해 나치즘이 발생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했다. 이 책은 한국 현대 정치사상의 특징 또한 이런 어긋남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해석하고 있다. 1948~87년 사이 한국에는 권위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중적 정치질서가 중첩적으로 병존(overlapping coexistence of dual political order)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정치사상 측면에서 전자가 일국적 시간대에 속한다면, 후자는 세계사적 시간대에 속한다. 이 양자가 충돌하면서, 동시에 서로 인식하고 반사하는 거울의 이중성처럼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주변부후발국이 겪는 일반적 경험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기본 개념은 한국만이 아닌 개발도상국 정치사상 연구의 기본적 방법론으로도 확장 가능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 책의 또 다른 기본 개념은 ‘민족주의의 신성화(sanctification of nationalism)’다. 저자는 한국 현대의 주요 정치사상으로 자유주의, 보수주의, 급진주의, 민족주의를 들고 있다. 그리고 민족주의야말로 이 모두를 포괄하는 최종 이념이었다고 본다. 민족주의는 일종의 정치적 종교로, 다른 정치이념과 달리 오염될 수 없는 또는 오염돼서는 안 되는 일종의 성역화된 이데올로기로 군림했다. 민족주의는 심지어 개개인의 삶 속에 체화된 이데올로기이자 종교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고 본다. 첫째는 민족주의에 의한 여타 이념의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of other ideologies by nationalism), 둘째는 민족주의 내에서 민족주의의 어떤 한 과제가 다른 과제를 압도하는 민족주의 내에서의 과잉결정(overpowering presence of one tasks/elements over other tasks/elements in nationalism)이다.


중층결정이란 정당성의 원천으로서의 민족주의가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이념을 재조형하는 현상이다. 예컨대 자유주의는 원래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민족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초월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유주의를 재정의한다. 과잉결정이란 민족주의 담론투쟁에서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다양한 과제 요소, 예컨대 분단극복(또는 통일), 경제발전(또는 근대화), 반공(또는 분단), 민주주의 등에서 어느 한 과제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다. 예컨대 박정희의 경우, 국가안보와 근대화를 강조하고 원론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혼란이나 국력낭비를 초래하는 반민족적 행위로 비판했다. 그 반면 급진파들은 통일을 강조하고 반공을 반민족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그리하여 이념의 해석과 강조점을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 투쟁이 발생했다고 본다. 1945년 이후 한국 현대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그동안 한국정치사상은 주로 전근대 시대를 다룬다는 암묵적 전제가 있었다. 오늘, 이곳의 정치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강 교수의 이번 책은 그런 통념을 깨뜨리며, 한국정치사상 연구의 시간적 지평을 넓혔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은 한국정치사상을 하는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정치사상을 하는 이유는 좋은 정치를 위해서다. 정치사상의 궁극적 관심은 바로 오늘인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정치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한국민은 5천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신 새벽 뒷골목에,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썼던 네 이름, 민주주의도 성취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격년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 순위를 발표한다. 한국은 대략 20위 정도로 ‘완전한 민주국가(perfect democracy)’로 분류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높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정치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한국민은 드물다. 그런데도 한국정치사상이 옛날만 연구한다면 너무 한가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답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 이 책은 우리 학계에서 그런 ‘고개 돌림’(periagoge)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현실 정치가를 다룬다는 점이다. 정치사상 연구는 통상 사상가나 이론가를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암묵적 전제다. 하지만 저자는 박정희를 다루고 있다. 물론 박정희는 뛰어난 이론가나 사상가가 아니다. 그동안의 박정희 연구도 다소 저널리스틱한 연구나 정치심리학적 연구에 그쳤다. 하지만 박정희는 한국 현대정치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정치가다. 그의 사유를 알지 않고는 한국 현대정치를 이끌어 온 정치사상의 조류를 이해하기 어렵다. 박정희는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시기의 역사를 지배한 시대정신의 핵심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치사상에 대한 깊은 소양을 바탕으로 박정희 정치사상이 가진 의미를 종합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또한 좌우 편향적 관점을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면,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로부터 비판적 거리두기”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의 출발은 차이(difference)를 인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보편으로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깊은 정치적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모든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질병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지성의 강인함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필자는 이 책이 당파적 논쟁을 넘어서기 위한 제3의 광장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국에서 정치학을 한다는 의미를 깊이 천착하고 있는 저자의 고민에도 깊이 공감한다. 저자는 일찍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한 저서를 낸 바 있지만, 그것이 서구 학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서구 학계는 서구뿐만 아니라고 인류적 의제들을 다루며, 글로벌한 학문적 공론장을 제공해왔다. 그에 비하면 우리 정치학은 초라하다. 우리 문제조차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 저자는 이제부터라도 동아시아 단위의 정치사상을 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하자고 말한다. 우리 정치학의 왜소성과 불임성을 극복하는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역사와 더 깊이 밀착되면 좋겠다. 물론 이 책은 통상의 정치사상 저술보다 역사를 깊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담론 중심, 이론 중심의 성격이 강하다. 필자는 역사 그 자체로부터 이론이나 사상을 탐구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예컨대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그의 연설에서 찾는 것도 좋지만, 예컨대 5·16이나 10월유신 같은 정치적 사건에서 드러난 정치사상을 탐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가 관습적으로 쓰는 정치사상과 다른 무엇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탐구로부터 현실과 긴밀히 연결된 산 정치사상의 뿌리가 자라날 것으로 생각한다.

김영수 영남대·정치외교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치사상사』(공저), 『건국의 정치: 여말선초, 혁명과 문명전환』 등의 저서와 『서양정치철학사』등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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