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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제국주의’의 그늘을 직시하자
‘하청제국주의’의 그늘을 직시하자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0.06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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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35회차 강연_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 ‘문명과 원시’를 논하다

▲ 사진·자료 제공 네이버문화재단

인류학자는 근대화를 어떻게 이해할까. 특히나 식민지를 경유한 발전경로를 밟아온 한국의 근대화라면 어떨까. 지난달 27일(토) ‘문화의 안과 밖’ 35회차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의 강연( ‘문명과 원시―하청제국주의 틀 속의 뒤어킨 이중나선’)은 바로 이러한 질문 위에 서 있었다.

정통 문화인류학에서 생태인류학, 문화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이번 강연에서 특히 근대화 문제를 ‘지식형성’의 관점에서 풀어내 눈길을 끌었다.

전 교수는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근대화 과정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封印된 ‘근대화’ 과정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풀어내지 않는 한 현재 우리의 삶이 왜 이리 고달픈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봤다.


‘봉인된 근대화 과정’을 바라보는 전 교수는, 常數로서 ‘제국 일본의 식민지 확장과 식민정책’을 지적했다. 뒤늦게, 외압에 의해 진행된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이해하려면, 전 교수는 제국 일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수입되고 유통된 ‘용어’들에 대한 점검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어 전 교수는 유럽에 대한 완벽한 모방이었던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번역의 시대’로 규정한다. “ 새로운 사상과 개념을 일본의 지성에 적합하도록 번역하는 작업이 ‘脫亞入歐의 전 과정”이었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전 교수는 19세기 일본의 제국주의를 가리켜 일종의 ‘下請’이었다고 진단했다. 서구라는 외부로부터 수입한 문물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번역을 통한 하청’이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일본이 자기화한 서구(근대화)를 식민지 조선은 재하청의 형태로 수용한 것이다. 전 교수는 제국일본이 수행했던 이런 ‘근대화’의 이식 및 전파 과정을 ‘下請帝國主義(bullying imperialism)’라고 명명했다.
그의 강연 내용을 발췌했다(전경수 교수의 강연 원고는 최종본이 아니며, 향후 일부 내용이 업데이트될 수 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명과 원시’라는 구도는 언뜻 보기에는 눈에 익은 듯하지만, 인류학자에게는 자못 생소한 것이다. 비대칭적 구도가 주는 묘한 유혹에 끌려서 도전해보기로 한 것의 결과가 이 원고이다. ‘문명과 야만’ 그리고 ‘유럽과 원시’라는 두 구도 속에서 쓴 것은 뱉고 달작지근한 부분만 선택한 조합이 ‘문명과 원시’다. ‘문명의 이기’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利器의 편리함에 중독된 사람들이 편리함이란 것 때문에 문명을 등지지 못하고, ‘원시’의 로만티시즘이 제공하는 ‘때묻지 않은 삶’의 모습이라는 신화에 매료돼서, ‘문명과 원시’가 하나의 구도 속에서 논의되기를 원하는 것이 현재의 지성사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구도에서 후면부에 가려진 삶의 어려움과 비참함은 모두 잊고 가리고 싶은 심정의 표현이 ‘문명과 원시’의 구도라고 생각한다. 들추어 보기 싫은 야만론이 봉인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화론도 봉인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은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하청제국주의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번역에서 비롯된다. Civilization의 번역에서는 문화차를 극복하는 문제가 있었고, Modern을 번역함에 있어서는 시간차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인지됐다. 문화차와 시간차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극복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한 결과를 생산한 것 같다. 타협과정은 애매모호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하청제국주의의 한계였다. 식민지로 이전된 재하청의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는 은폐될 수밖에 없었고, 재하청의 결과는 사실로부터 한층 더 격리되는 결과를 생산하게 됐다. 결국, 하청의 문화차와 시간차의 범위는 재하청에서 최소한도 배가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재하청의 과정에 연루된 식민지 지식인들의 한계에 대해 역순의 自省 과정이 필연적으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원시(primitive)와 modern의 대별이 스테레오타입화된 인류학적 구도가 19세기의 민족학이었으며, 원시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이용의 停滯, 전달수단의 빈곤, 문맹이라는 조건들로 구비된 것이라는 조작적 정의가 작동한 것이 19세기말까지의 인류학이었다. 그 정의는 modern 유럽에 대항되는 개념으로 사용됨으로서 사회진화론의 ‘문명과 야만’이란 구도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수용됐다.
재하청의 단계에서 문화차와 시간차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흔히 전개되는 과정은 차이의 무시라는 행위이다. 그 결과 매뉴얼과 조심이 없는 과정이 전개되게 마련이고, 그 과정은 문명의 야만화일 수밖에 없다. 과학적 방법으로 무장된 문명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매뉴얼이 있게 마련이다. 환언하면, 야만이란 매뉴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사람의 지혜로 축적된 원시의 매뉴얼은 조심(조심이 두터워지면 신앙이 되는 것)이다. 문명에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매뉴얼은 또 다른 짐이 된다. 그 새로움에 다가서는 조심이 필요하다. 매뉴얼은 무시되고 조심이 사라진 근대화는 야만의 극상으로 변모한다.


야만사회도 사회이니만큼, 사회로서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설정한 것이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그린 모르간의 설명이었다. 사회의 범주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는 야만의 등급이 사회의 복원력에 의해서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제시된 것도 모르간이 그린 도식이다. 보편적인 이성과 합리성을 믿었던 사상가는 ‘野蠻以下’의 상태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회로서의 복원력을 상실한 인간사회의 상태를 모르간은 상정하지 못했다. ‘야만이하’의 존재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歲月號 침몰’이다. 애꿎은 인명을 가둔 배는 가라앉고, 책임자는 허둥지둥, 정부는 갈팡질팡, 구조본부는 우왕좌왕, 정객들은 옥신각신, 언론은 설왕설래, 총체적으로 뒤죽박죽이다. 선박침몰의 경우에 대비한 매뉴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야만사회의 대표적인 사례다.


문명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을 포함한 자연을 생각하면, 이제 시뮬레이션과 학습은 충분히 이뤄졌다. 설령 시뮬레이션과 학습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지구종말시계가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어야 하는 어리석음을 기다릴 바보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지혜의 발로일 것이다.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현장에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번역과 하청 그리고 재하청으로 무장한 지식인에 대한 기대감은 더 이상 없다. 여태까지 살아왔던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했던 지혜만이 필요할 뿐이다. 발전론이 제공하는 안락한 둥지 속에서 지식을 팔던 시대는 끝났다. 발전론이 허구의 사회진화론을 승계한 지식의 덩어리라는 점이 명약관화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modern은 서구의 묘혈이었다. 미래를 갉아먹는 자본주의가 묘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반복해서 증명된 바 있고,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람이든지 흙이든지 공기든지 모조리 집어 삼키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지구 전체를 묘혈로 만들어 가고 있다. 서구는 그 묘혈을 대리인에게 양도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혹성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발전론의 끝이 혹성탈출인 모양이다.


답은 지혜에 있다. 빙하기를 살아왔던 인류의 지혜에서 답이 나올 수 있다. 가족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 물물교환으로 부족한 삶의 부분을 메꾸어 냈던 지혜를 역순으로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남겨 준 현장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에서, 살아가고 지혜를 학습하는 과정과 그러한 지혜들을 실천하는 행동이 기다리고 있다. 그 현장은 ‘야만’도 아니었고, ‘원시’도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일상생활이 진행됐던 삶의 현장일 뿐이었다. ‘야만’의 존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문명’이 타자화한 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고, ‘원시’의 개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modern’이 타자화한 대상일 뿐이다.


아직도 나는 ‘시민’ 개념이 요원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한 직접 경험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主權在民의 ‘民’은 백성(=국민)이라는 의미이지, ‘시민’의 ‘민’이 아닌 세상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형식은 civil의 ‘민’이라고 보이지만, 내용은 그것이 아닌 이유를 철저하게 알아야할 이유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은 한 장의 票에 불과한 卒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제 목전의 과제는 분명하다. 번역과 하청의 과정에서 왜곡된 개념의 진실이다 제국일본의 내부사정으로 인해서 Civilization이 ‘문명’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헤집어 보기 위해서 나는 프랑스 혁명의 내용과 영향을 다시 읽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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