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2:00 (토)
[해외통신원 리포트] 영국에 불고있는 ‘홉스봄’ 열풍
[해외통신원 리포트] 영국에 불고있는 ‘홉스봄’ 열풍
  • 이택광/영국통신원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10-12 11:34:02
올해로 여든 다섯에 접어든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재미있는 시대Interesting Times’가 잔잔한 공감을 얻고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프란시스 뉴턴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현역 재즈 평론가이기도 한 이 노학자의 자서전은 단순한 전기물을 넘어서서, 홉스봄이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또 하나의 역사서라고 할만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홉스봄은 1917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폴란드계 영국인 아버지와 유태계 오스트리아인 어머니를 사이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보낸 홉스봄의 소년 시절은 참혹한 것이었다. 대공황과 나치즘에 얼룩진 그의 유년을 보상할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처참한 시대를 ‘재미있다’고 명명한 이 책의 제목은 다분히 반어적이다.

자신이 순수한 독일 혈통이었다면 아마도 나치 당원이 됐을 것이라는 홉스봄의 고백은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런 고백에서 전통을 역사적 창안으로 정의했던 홉스봄 특유의 세계관을 읽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홉스봄은 당시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선택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진술한다. 이런 그의 태도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고집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버거운 이런 신념의 뿌리는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일까.

홉스봄의 부모는 대공황과 전쟁을 거치면서 질병으로 모두 사망한다. 그후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홉스봄은 1933년 13살의 나이로 홀홀 단신 영국으로 건너온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토록 고대했던 노동자의 낙원이 아니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 것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극악한 냉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린 시절부터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던 홉스봄에게 가해진 불이익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어린 시절의 이념을 포기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홉스봄의 삶은 희생과 유토피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정 희생이 없다면 유토피아도 없는 것일까. 홉스봄은 영국에서 인기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데저트 아일랜드 디스크에 출현했을 때, 수백만 명이 희생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가 실현되어야 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도발적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우회적 화법을 싫어하는 역사학자답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의 대답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홉스봄의 태도는 단호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홉스봄의 말은 현실 사회주의 또한 당시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판단이란 것이 당대의 상황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홉스봄의 역사관은 바로 이런 체험적 사실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닐까.

1968년 이후 서구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의 실패’를 이용했다는 홉스봄의 한마디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 홉스봄은 타성에 젖은 서구 지식인들에게 자기 성찰의 질문을 되돌려준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보상 없이 희생됐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유진영에서 일어난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들의 희생은 정당하게 보상된 것인가”. 원인과 결과의 전후관계를 따지자면 이런 희생의 근본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이 홉스봄의 입장이다.

물론 홉스봄이 현실 사회주의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역사학자답게 현실 사회주의를 하나의 유토피아주의와 그 실패로 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땅히 보전해야 할 것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주의이다. 홉스봄이 스탈린주의에 저항하면서도, 1991년 자체적으로 해산되기까지 영국 공산당의 당원으로 잔류했던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명분 뿐이긴 했지만, 공산당원이란 신분은 그를 과격분자로 낙인찍도록 했으며, 이런 낙인은 적잖은 경력상의 불이익을 홉스봄에게 초래했다. 특출한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옥스퍼드대이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에 발을 붙이지 못했으며, 1970년이 돼서야 겨우 런던대의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모습을 두고 비타협적이고 불요불굴한 혁명투사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의 발로이다. 홉스봄을 잘 아는 이들은 사회적 전문 분야를 초월해서 광범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사교성을 상찬한다. 본인 스스로 투철한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전혀 이데올로기적 면모나 아카데미즘의 혐의를 드러내지 않는 그의 풍모가, 그의 사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를 따르는 ‘홉스봄 세대’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의 기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홉스봄 스스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영국 젊은이로서 한때나마 공산주의를 했던 것이 아니라, 대륙 출신 유럽인으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한 가운데에서 그 사상을 (현실로서) 택했던 것이다”.
이택광/영국통신원, 셰필드대 박사과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