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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학문화된 한국 경제학에 던진 근본적인 질문
형식 학문화된 한국 경제학에 던진 근본적인 질문
  • 교수신문
  • 승인 2014.09.1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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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어떻게 볼 것인가

▲ 사진제공 글항아리 ⓒ Emmanuelle Marchadour

1971년 프랑스 파리 인근의 클리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뒤 22세에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과 런던 정경대에서 부의 재분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93년부터 3년간 MIT에서 경제학을 가르쳤으며, 1995년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2000년부터 파리경제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로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다. 우리 나이로 43세니 소장학자라고 할 수 있지만, 2000년부터 파리경제대 교수로 재직해왔으니 소장학자라고 부르기도 뭣하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장경덕 옮김, 이강국 감수, 글항아리, 820쪽, 33,000원)이 국내 번역됨으로써, 세계를 강타한 ‘피케티 현상’의 실체를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됐다. 이 책이 2013년 프랑스에서 출판됐을 때는 세인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지만, 2014년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자 아마존에서 책이 동나고, 지금까지 5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 한 권으로 피케티는 일약 세계적인 경제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국내에서는 이 책과 함께 상대적으로 분량이 짧은 『불평등 경제』(유영 옮김, 노형규 감수, 마로니에북스, 240쪽, 15,000원)도 소개됐다.
책의 결론은 간단하지만,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300년에 걸친 장기 통계와 끈질기게 씨름해야 했다. 피케티의 진단은 이렇다. 21세기에는 자본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자본의 소득 몫이 커지며, 자본이 자본을 낳는 이른바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가 도래할 것이다.
피케티의 질문은 사회과학의 위기라는 자성이 높아가는 한국 학계에 시사적이다. 그는 통계에 기대고 있지만, 數의 현상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현실을 더 직시하고자 했다. 책의 서장 맨 앞에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라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를 둔 것도 그런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경제학적 분석의 중심에 ‘분배 문제’를 두는 것으로 밀고 나갔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불평등 문제를 경제 분석의 한가운데에 되돌려놓고 19세기에 처음 제기됐던 문제들을 다시 다뤘어야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부의 분배를 소홀히 했다.”
경제학이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도발적인 43세의 경제학자의 『21세기 자본』을 과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정우 경북대 교수의 글을 빌려 피케티 독해를 모색해본다.


피케티의 이론 구조가 워낙 단순하면서 3세기에 걸친 방대한 통계자료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허무는 것은 정통파 경제학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피케티의 주장은 정통파 경제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쾌한 내용이 많으므로 이를 묵과하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앞으로 피케티 논쟁은 매우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가 될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문자 그대로 ‘피케티 현상’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것은 학문 세계의 일대 사건이다. 이 책은 본문만 800여쪽이나 되므로 다 읽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요한다.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많은 숫자와 도표가 나온다. 숫자는 너무 많아 따라가기 힘든데, 사실 일반 독자들은 일일이 따라갈 필요가 없다.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큰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수많은 도표는 저자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경제학 책치고는 수학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해봤자 초등학교 산수 수준의 식이 딱 3개 나올 뿐이다.

학문적 사건으로서의 ‘피케티 현상’
이 책은 아주 인문학적이다. 책에는 제인 오스틴,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이 자주 등장하고 길게 인용된다. 이런 경제학 책은 두 눈 비비고 찾아봐도 없다. 그는 소설을 즐겨 읽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경제학에 응용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는 19세기 소설에서 나오는 자본과 수익률 개념을 소개하면서 그런 개념이 더 이상 현대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이유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피케티의 책은 소설이 아니고 불평등을 다룬 경제학 저서다. 근래에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 로버트 라이히의 『슈퍼 자본주의』, 조셉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듯이 요즘은 불평등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몇 년 전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나타난 ‘1대 99의 사회’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책은 샌들, 라이히, 스티글리츠의 책과는 달리 장기 자료를 통해 이야기한다. 300년에 걸친 여러 나라―주로 프랑스, 영국, 미국, 스웨덴, 독일 등―의 장기 통계를 가지고 불평등의 변천을 보여주며, 앞으로 21세기에 우리 앞에 닥칠 미래를 이야기한다. 아주 특이하게도 3개의 수학 공식과 300년의 역사적 통계자료, 이것이 피케티의 무기다.

어두운 전망
그런데 피케티가 그리는 자본주의의 미래가 심상찮다. 그에 따르면 지난 300년간의 자본주의는 잠시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불평등이 커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19세기에도 그러했고 최근에도 그러하다. 다만 1914~1945년 시기에만 잠시 불평등이 축소됐을 뿐이고 이것은 자본주의의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예외적 시기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80년 이후에는 다시 불평등이 커지고 있으며, 이 추세는 앞으로 21세기 내내 계속되어 우리의 미래는 별로 밝지 않다는 우울한 예측이 이 책의 주장이다.
20세기 초중반에 불평등이 축소된 이유는 연평균 3퍼센트의 고성장,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의 누진소득세 도입, 전쟁으로 인한 파괴, 인플레이션 등 우발적 요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영국의 대처주의의 등장으로 소득세율은 다투어 인하됐고, 앞으로 장기적 성장률도 1.5퍼센트를 넘기 어려울 것이므로 불평등 강화 요소를 상쇄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평등 강화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답은 그가 자본주의의 기본법칙이라고 이름 붙인 두 개의 간단한 수식을 보면 된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제1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α = r × β
여기서 α는 국민소득 중에서 자본에 돌아가는 몫이고, r은 자본의 수익률, β는 자본/소득 비율이다(피케티의 제1기본법칙은 법칙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은 항등식이다).
피케티는 α의 값이 21세기에 점차 높아질 것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r은 대체로 4~5퍼센트로 일정한데, β의 값이 점차 높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왜 β값이 높아질까. 그것은 β값을 결정하는 제2기본법칙을 보면 알 수 있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제2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β = s/g
여기서 β는 자본/소득 비율, s는 저축률, g는 경제성장률이다(이 식은 원래 해러드-도마 성장모델에서 유래한다).
피케티는 21세기에 성장률이 높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두 가지 힘, 즉 인구 성장과 기술 진보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세기의 g는 1.5퍼센트를 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r과 g의 경주는 보나 마나 r의 승리다. 피케티는 이것을 과거(r)가 미래(g)를 잡아먹는다고 표현한다. r은 4~5퍼센트, g는 1.5퍼센트라면 21세기에 α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21세기에 자본/소득 비율(β)은 높아지고, 국민소득 중에서 자본의 몫(α)은 계속 커질 것이며 노동의 몫은 줄어들 것이다. 21세기에는 자본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자본의 소득 몫이 커지며, 자본이 자본을 낳는 이른바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가 도래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이 책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 마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센 강의 음습한 지하도처럼.

두 가지 해법
이런 암울한 전망에 대해 피케티는 두 가지 해법을 제시한다. 자본의 몫이 계속 커지고 소득 불평등이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누진적 소득세율의 인상을 제안한다. 소득세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누진세가 도입된 것은 불과 100년밖에 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누진세는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다가 갑자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천문학적인 전비 조달을 위한 목적으로 급작스레 도입됐기 때문이다. 각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웬만하면 70퍼센트를 넘었고, 심지어 90퍼센트를 넘은 나라도 있었다. 이런 높은 소득세율 체제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됐는데,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주의가 등장하면서 급속히 무너졌다.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최고 세율이 30퍼센트대에 머물고 있으니 今昔之感이 있다.


피케티는 노동 의욕에 불리한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최고소득세율을 얼마까지 높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한 끝에 80퍼센트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과거 자본주의 황금기 때의 소득세율이다. 그러면 지금 30퍼센트대로 뚝 떨어진 세율을 과연 그렇게 높이 올릴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는 의문부호를 단다. 이것은 결국 정치의 문제인데, 피케티는 세습자본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소득세율의 대폭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또 하나 피케티가 제안하는 정책은 세계 자본세(global capital tax)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은 개인이 소유하는 모든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을 뜻하는데 이는 주택, 부동산, 실물자본, 특허권, 금융자산 등을 망라한다. 따라서 이 세금은 유럽 몇몇 나라에서 시행 중인 부유세와 비슷하다. 자본세를 과세할 때는 소득세와 마찬가지로 누진세율을 적용한다. 피케티는 하나의 가상적인 예로서 100만 유로 이하의 순자산은 면세, 100~500만 유로는 1퍼센트, 500만 유로 이상은 2퍼센트의 세율을 제안하고 있다. 이 세금은 상당히 파격적이고 어떻게 보면 급진적인 면이 있다. 만일 이런 세금을 한 나라에서 과세하면 틀림없이 부자들이 다른 나라로 국적을 옮길 것이기 때문에 피케티는 만국 공통으로 세계 자본세를 매기자고 제안한다.
세계 자본세에 대해서는 많은 논평자가 실현 가능성을 의심한다. 지금과 같이 각국이 서로 세금을 인하해가면서 해외자본을 유치하려고 조세경쟁을 벌이는 마당에 이런 급진적인 과세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피케티도 세계 자본세의 실행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이 제안을 스스로 유토피아적이라고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피케티는 21세기에 r이 g보다 높아져서 자본의 몫이 커지는 경향, 그리고 세습자본주의의 도래, 이런 암울한 미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피케티가 생각하는 21세기의 국가는 사회적 국가(social state)다. 그에 의하면 국가의 역할은 20세기 이후 큰 지각변동을 해왔다. 20세기 초만 해도 세수 규모로 측정한 국가의 크기는 국민소득의 1할 미만이었다. 이런 재정으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국방, 치안, 사법 정도가 전부다. 이것이 이른바 야경국가 혹은 최소국가다.
그러나 20세기가 대공황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의 역할은 급속히 증대됐다. 보편적 의료와 교육을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가 됐고, 거기에 연금, 실업보험, 이전지출 등의 사회보장이 추가됐다. 그리하여 선진국에서 국가의 크기는 국민소득의 30~50%에 달한다. 여기에 1980년대 이후 보수 반혁명의 역풍이 불어 다소 후퇴 기미가 보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회적 국가는 건재하다. 불평등 심화가 우려되는 21세기에 우리는 어떤 사회적 국가를 지향할 것인가, 이것이 피케티가 던지는 질문이다.

피케티는 틀렸나?
피케티의 책이 나오자마자 경제학계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피케티를 둘러싼 시시비비는 하도 다양해서 이런 논쟁을 정리하기만 해도 책이 한 권 나올 정도다. 폴 크루그먼 같은 진보적인 경제학자는 피케티를 아주 높이 평가하는 반면, 현재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교과서 『경제학원론』의 저자인 그레고리 맨큐 같은 보수적인 경제학자는 피케티를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피케티는 워낙 거물이 돼 이제는 비판하는 쪽에서도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다양한 비판이 있었지만, 피케티 책에 제법 길게 소개돼 있는 이른바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혹은 케임브리지-케임브리지 논쟁)과 관련, 제임스 갤브레이스는 피케티의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 논쟁은 1950~1960년대에 미국 케임브리지 시에 있는 MIT대의 새뮤얼슨, 솔로와 다른 한편 영국 케임브리지 시에 있는 케임브리지대의 로빈슨, 스라파, 파지네티에 의해 벌어진 논쟁으로서 자본의 개념, 한계생산력이론의 타당성 여부, 성장이론, 분배이론을 둘러싼 진검승부였다. 결국 1966년에 새뮤얼슨이 오류를 인정함으로써 미국 신고전파가 영국의 신케인스파에 패배한 유명한 논쟁이다. 피케티는 젊은 시절 MIT에서 3년간 연구생활을 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갔기 때문에 본인의 사상적 성향과는 달리 부지불식간에 MIT 쪽에 친근한 태도가 드러난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이런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케티의 설득력은 아직 별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피케티의 이론 구조가 워낙 단순하면서 3세기에 걸친 방대한 통계자료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허무는 것은 정통파 경제학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피케티의 주장은 정통파 경제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쾌한 내용이 많으므로 이를 묵과하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앞으로 피케티 논쟁은 매우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가 될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근본적인 질문
성장지상주의를 신봉하는 한국에서 소득이나 부의 불평등 문제는 금기 비슷하게 취급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계자료도 부족하고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저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갑자기 피케티 현상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도 피케티의 α, β를 추정하려는 노력이 막 시작되고 있다.

마침 2014년 5월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국민대차대조표라는 자료를 발표했다. 다른 나라에는 더러 있으나 한국에는 없던 통계자료다. 이것 없이는 β의 추정이 불가능한데, 때마침 정부가 새 통계를 발표한 것이다. 이 자료를 갖고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에서 잠정 추계한 것을 보면 한국의 β 값은 7을 넘는다. 이 값은 선진국에서 대개 5~6 정도다. 피케티 연구에서 β 값이 가장 높은 일본, 이탈리아보다 한국이 더 높게 나온 것은 한국에서 부의 불평등이 상당히 심각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것은 100년 전 프랑스의 이른바 벨 에포크 시대에나 있었던 높은 값이다. 이 추정치는 아직 잠정적인 계산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확실한 답이 나올 것이다.
또 하나 피케티 현상이 한국에 주는 충격이 있다. 그것은 한국 경제학계의 풍토에 관한 것이다. 피케티는 이 책에서 현대 정통파 경제학에 대단히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는 경제과학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고(노벨상은 경제과학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경제학이 과거 전통이었던 정치경제학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그의 연구 방법은 지금까지 추상적, 사변적 논리에 빠진 경제학자들이 무시해왔던 아주 기본적인 통계자료를 성실히 수집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작업이어서 추상적인 분석에 능하고 세상일에는 초연한 한국 경제학자들에게 크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피케티는 자신의 책이 역사학자에게는 너무 경제적이고, 경제학자들에게는 너무 역사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경제학자들은 역사를 무시하고, 인문을 무시하고 경제학으로 세상만사를 해석할 수 있다는 지적 오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문사철은 고사하고 이웃 사회과학 분야와도 담을 쌓고 인간세계와 무관한 게임을 즐겨온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제학이 과연 현실의 경제문제 해결에 얼마나 쓸모 있는지 물어볼 때다.
이것이 과학적 환상에 빠져 거의 형식 학문화하고 있는 한국 경제학에 대해 피케티 열풍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본다.


 


이정우 경북대·경제통상학부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부터 경북대에서 불평등의 경제학, 경제민주주의를 강의해왔다. 『불평등의 경제학』, 『경제민주화: 분배친화적 성장』(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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