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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론적 역사해석에서 벗어나면 조선시대 과학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목적론적 역사해석에서 벗어나면 조선시대 과학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4.09.0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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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31회차 강연_ 문중양 서울대 교수의 ‘동양과 한국의 과학 전통’


지난달 23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31회차 강연은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진행되는 6섹션의 두 번째 순서였다. 강사는 문중양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주제는 ‘동양과 한국의 과학 전통: 조선에서의 이질적 동서양 두 과학의 만남’이었다. 이 강연이 눈길을 끈 데는 문 교수의 독특한 이력도 한몫 거들었다. 문 교수에게는 ‘이학박사(과학사 전공)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국사학과에 임용된’ 교수라는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는 방대한 한국사의 영역 중에서 특히 ‘조선시대 과학사의 재해석’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문 교수는 조선시대 과학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우리 전통과학을 바라보는 세간의 상식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가 설명하는 우리의 전통과학에 대한 일반의 상식은 이렇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15세기 전반 세종대왕 때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할 정도로 절정을 이룬 후 계승·발전되지 못하고 쇠퇴했으며, 17세기 이후 서구과학의 유입이라는 외적 충격에 의해 비로소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이후 19세기 들어 조선이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조선의 과학기술도 쇠락해 개항기를 전후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 결국, 근대과학과 강력한 무기기술로 무장한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침탈해 들어오던 시기에 그에 대응할 우리의 과학기술은 부재했고 이는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문 교수의 반론 핵심은 “한국 전통 과학은 자신의 방식대로 새로운 과학을 구성해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세종 시대에 눈부신 성취를 이룩했던 우리의 과학은 그 이후에 계승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졌으며,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 학인(사대부 지식인)들의 형이상학적인 자연인식 체계는 16세기 이후 오히려 고도화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명응의 상수학적 자연인식’과 ‘최한기의 氣輪說’이다. 조선 후기의 학인들은 감각경험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지구설이나 천체운동의 법칙을 성리학적 자연인식의 체계를 이용해 이해했으며, 그 과정에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새로운 과학을 구성해냈다.
문 교수는 또한, 17세기 이후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기대 이상으로 서구과학의 수용과 이해에 적극적이었고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개항기 직전에 우리 사회에 ‘과학이 없었다’는 서술은 19세기 말 근대라는 화려한 외피를 입은 채 급격하게 유입된 ‘서양과학은 없었다’로 바뀌어야 타당하다는 것이 문 교수의 지적이다.


“서구의 과학과는 완전히 다른 비서구 과학(non-Western Science)에서 어떠한 방향의 역사적 전개를 발전 또는 쇠퇴라고 볼 수 있을까?”라고 물음을 던진 문 교수는 우리 사회가 우리의 전통과학에 대해 이처럼 잘못된 상식과 이해를 갖게 된 심층 요인을 과학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오래된 목적론적 역사 서술의 전통에서 찾았다. 즉, 목적론적 역사해석에 의존하면서 현대과학과 유사한 형태의 과학의 형성만이 과학의 발전이라고 이해하게 됐다는 비판이다.
다음은 문 교수의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사진·자료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종 시대에 눈부신 성취를 이룩했던 우리의 과학은 그 이후에 계승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졌다. 오히려 기술적(technological) 지식의 층위가 아닌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연 이해는 15세기에 초보적이었던 것이 이후 성리학의 성숙과 함께 성장했다. 그래서 침체돼 있던 우리의 ‘낡은 과학’이 서구의 ‘새로운 과학’이라는 외적인 충격에 의해서 비로소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서구 과학이 유입돼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의 과학, 특히 사대부 지식인들의 자연이해의 방식과 태도는 발전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유입돼 들어온 서구 과학을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학습하고 소화해 갔다.
조선후기의 위정자들과 일부의 지식인들은 서구과학의 수용과 이해에 비교적 적극적이었고, 그들이 기대한 만큼에 있어서는 성공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과학의 변화는 19세기에도 지속됐을 것이며, 개항기 직전에 우리 사회에 과학이 없었다는 서술은 19세기 말 ‘근대’라는 화려한 외피를 입은 채 급격하게 유입돼 들어온 ‘서양과학(Science)은 없었다’로 바뀌어야 타당하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제시해본 조선 과학의 변화에 대한 필자의 역사 서술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실토해야겠다. 종래의 잘못된 상식적인 이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과감하게 서술해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많은 허점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 다른 잘못된 역사적 이해를 낳을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과감하게 서술한 동기는 우리의 (동양 또는 조선) 과학에 그간 쇠퇴와 실패, 그리고 거부라는 딱지만을 붙여왔던 상식의 강고함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강고함은 근대 사회에서의 ‘서양과학의 성공’과 ‘동양과학의 실패’라는 담론에서 연유했던 바가 컸다.


이는 이른바 근대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역사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며, 더욱 근원적으로는 과학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오래된 목적론적 역사서술(Teleological Historiography)의 전통에 연유한다고도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의 역사 서술은 과거의 자연 지식의 연결망 전체에서 특정한 구성 요소로서의 개별적이고 기술적인 전문화된 지식을 선택적으로 발췌·분리해내고,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지니는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비춰 해석하곤 했다. 이러한 해석은 그것이 생겨났던 역사적 맥락(Contexts)과 완전히 분리돼 이뤄졌으며,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의 관심은 오로지 발전(Development), 정체(stagnation), 그리고 쇠퇴(Decline) 중의 한 가지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구의 과학과는 완전히 다른 비서구 과학(non-Western Science)에서 어떠한 방향의 역사적 전개를 발전 또는 쇠퇴라고 볼 수 있을까. 목적론적 역사해석에 의하면 현대과학과 유사한 형태의 과학의 형성을 ‘현대 과학과 유사한 형태’의 과학의 형성을 발전이라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초에 부재했고,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 이후 조선 학인들의 자연을 이해하는 기본 틀이었던 성리학적 자연인식 체계의 고도화는 ‘과학의 쇠퇴’일 수밖에 없다. 서명응의 상수학적 자연인식과 최한기의 기륜설은 ‘현대과학과 유사한 형태’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선시대 우리의 과학을 역사적 맥락에서 공평하고 대칭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과 같은 목적론적 역사해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전문적인 기술적 지식들을 그것이 처해있던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제 배경과 분리해내서는 안 된다. 전문적 자연지식(scientific techniques)만이 과학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의 문화와 사상은 자연 지식과 함께 당대의 과학 네트웍을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목적론적 역사해석은 조선후기 ‘서양과학’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용했으며, 낡고 오래된 그래서 비과학적이라고 이해되던 ‘조선(또는 동양) 과학’을 얼마나 철저하게 부정·극복했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모여 있다. 이 역시 ‘현대과학과 유사한 형태’의 등장을 갈망하는 욕구에 기인한다. 필자의 관심은 이와는 달리 고전적 자연지식과 자연인식 체계가 조선 전기 이래 어떻게 변화해 갔으며, 보다 세련되고 체계적인 고차원의 자연인식 체계로 무장한 유학자들이 외래의 서구 과학 지식이 담긴 서구 과학 문헌들을 접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읽어냈는가에 있다.


서로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질적인 두 과학, 즉 조선과학과 서구과학이 조선후기 한반도에서 서로 대면했다. 그런데 토마스 쿤의 개념을 빌려서 말하면 조선과학의 패러다임 하에서 자연을 이해하던 조선 유학자들이 고전적 자연 지식의 연결망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조선과학을 거부하고 서구과학을 수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역사적 사례다. 실제로 조선 유학자들 대부분은 19세기 말까지도 조선과학의 패러다임 하에서, 즉 ‘그들의 방식’인 성리학적 자연인식 체계로 서구 과학을 읽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실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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