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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대학,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연중기획-대학,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 박나영 기자
  • 승인 2002.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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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푸대접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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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ㅇ대학에서 독문학을 강의하는 시간강사 변 아무개씨는 ‘강사님’ 소리만 들으면 울분이 솟는다. ‘강사’라는 호칭 속에는 ‘교수가 아닌 자’라는 의미가 녹아 있고, 그 이면에는 부러 교수와 차별을 두려는 대학측의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강사노조가 결성돼 ‘교수’와 ‘강사’의 구별이 아닌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교수’로 호칭할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교수는 교수요, 강사는 강사다.

스스로도 헷갈리는 정체성…능력있어도 찬밥
과연 시간강사들은 학교로부터, 학생들로부터, 정규직 교수들로부터, ‘교육자’로 여겨지고 있을까. 학교에는 ‘지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값싼 일일 잡부’로, 학생들에게는 ‘빨간펜 선생님’으로, 교수들에게는 ‘박사후과정’ 정도로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업적평가제 시행은 교수들이 강의보다는 연구에 힘을 쏟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강의시간을 메꾸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시간강사가 대거 투입됐다. 교육인적자원부에 의하면 2001년 현재 전국 4년제 대학의 시간강사 수는 4만4천6백여 명에 이른다.

엄연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들 4만여 명 강사들은 그러나 ‘교수’가 아니다. 교수가 아니기에 연구실도 없다. 도서관은 학부생들로 넘쳐나고 ‘교·강사 휴게실’이 아닌 ‘교수 휴게실’에는 발을 들여놓기조차 힘들기 때문에, 중간에 비는 시간이라도 있을라치면 빈 연구소, 조교실 등에서 더부살이를 하기 일쑤다.

그나마 몇몇 학교에서 ‘강사실’을 마련했고, 또 몇 학교에서는 컴퓨터를 들여놓는 등 강의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개방된 공간 속에서 남는 시간을 때우고 동료 강사들과 잡담을 나누는 이외의 ‘생산적인’ 일들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강의 부담도 만만치 않다. 수강인원이 20명 정도 되는 전공강의와는 달리 강사들이 주로 전담하고 있는 교양강의에서는 1인당 학생수가 비대한 탓이다.

ㄱ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김 아무개 씨는 지난 한 학기 동안 한 강좌당 1백명씩 모두 8강좌, 도합 8백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맡아야 했다. 토론식 수업 등 수업의 질적인 측면에 신경쓰기 어렵다는 불평은 둘째치고, 김 교수에게는 때늦은 ‘시험 공포증’이 생겼다.

시험 한번 치를 때마다 8백여 명의 시험지를 채점해야 하니, 이는 고역을 넘은 공포다. 한번 채점하는 데 2주일은 기본. 사정도 모르고 빨리 성적을 제출하라고 재촉하는 행정직원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강사들에게는 ‘대가없는 노동’인 시험지 채점을 돕기 위해 서울의 ㅇ대학에서는 쓰기 강좌에 ‘첨삭조교’를 기용했다. 그러나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체크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강사들은 입을 모아 “내가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쓰기 시험을 10번 이상 보라고 요구하고, 현실적으로 이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는 강사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수업에 대학 기자재를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ㅅ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차 아무개 씨는 학생들에게 비디오를 보여 주려 하다가 봉변을 당했다.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하기 위해서는 도서관에 들어가야 하는데 도서관 출입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경비는 그야말로 잡상인 취급을 했고, 여기저기 확인해본 후에야 겨우 도서관 출입과 비디오 테이프 대여를 허락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비디오 상영도 꺼려진다. 꼭 필요한 때에는 ‘지난번에 왔던 사람’이라고 경비의 기억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나마 이들 시간강사들은 소리내어 요구하기도, 힘을 모으기도 쉽지 않다. ㄱ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조 아무개 씨는 “각자 ‘자신만 교수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사노조가 만들어지기는 매우 어렵다”며 “‘튀는 놈’으로 찍히면 당장 다음 학기부터 강의조차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ㅅ대학에서는 시간강사들이 통산 6학기 이상을 강의할 수 없도록 못박아 두기까지 했다. ‘신진학자들의 원활한 이동’이라는 대학측의 이유야 어쨌든, 3년이 지나면 강사들의 목소리가 굵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시간강사들의 지적이다.

임성윤 전국대학강사노조 위원장은 “실제로 강사들에게는 교육환경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강의에 관련된 모든 사항들은 강의를 담당하는 강사 자신이 아닌 대학본부와 전임교수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결국 시간강사들은 ‘시키는 일이나 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돼 버렸다”고 토로했다.

서울대생들의 2002학년도 1학기 강의평가에서는 강사 수업 점수(평균 40.21점, 만점 50점)가 전임교수 점수(평균 38.95점)보다 높게 나타났다. 시간강사들의 수준은 날로 높아지고 어깨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지만, 대학 내에서 이들의 설자리는 여전히 좁고 ‘좀 나은 교육환경’을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오늘도 메아리로 돌아온다.

박나영 기자 imna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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