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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월북과 학문장 재편을 보는 시선
지식인 월북과 학문장 재편을 보는 시선
  • 교수신문
  • 승인 2014.07.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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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학연구원, ‘분단시대의 앎의 체제, 그 너머’ 모색


 

지난 19일부터 이틀간 연세대에서 열린 연세대 국학연구원(원장 백영서)의 학술대회 주제는 ‘분단시대의 앎의 체제, 그 너머’였다. 이 주제가 솔깃한 이유는 지식인의 이동과 지식의 분단을 조명했기 때문. 이준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발표한 「지식인의 월북과 학계의 분단」이 이 주제를 압축했다. 이준식 연구위원의 글 가운데 ‘월북에 따른 학문(지식)장의 재편’ 부분을 발췌했다.

남한과 북한에 별개로 존재하는 학술원·과학원이 일제강점기에 추진되던 중앙아카데미의 결실로 해방 직후 서울에서 출범한 조선학술원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을 아우르는 앎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단 시대 학문(지식)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대체로 개별 분과 학문 중심이거나 학설사 내지는 좁은 의미의 학문연구사 위주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 월북에 따른 학문(지식)장의 재편은 특정 개별 분과 학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예술 등 각 분야마다 차이가 존재했고, 각 분야의 개별 분과 학문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다. 차별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차별성보다는 보편적 측면에 더 주목하려고 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지식인이 북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좁은 의미의 학문적 동기가 아니라 더 큰 실천적 동기에 있었기 때문에 월북 지식인의 학문 활동은 처음부터 강력한 실천성을 띠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월북 지식인이 월북 이전에 남에서 진보적 학술 운동에 적극 나선 바 있었다. 백남운이 중심이 된 조선학술원도 좌우를 망라한 통일전선적 학술단체라고 하지만 핵심을 이룬 것은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고등·중등·초등교육기관의 교원을 망라해 민주적이고 평등한 교육 이념의 실현을 내걸고 다양한 활동을 벌인 조선교육자협회(1946년 2월 결성)의 중심을 이룬 것도 이만규(배화여고 교장), 김택원(경성대학·서울대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식인의 대거 월북이 해방 전까지만 해도 남에 편중돼 있던 학문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서울과 평양이라는 두 중심으로 학문 체제가 재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과 국립서울대가 거의 동시에 출범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공학부와 의학부까지 포괄하던 김일성종합대학이 곧 평양공업대학과 평양의학대학 등을 분리시키면서 인문사회과학과 순수 자연과학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빠른 기간에 북의 학문 체제가 남의 그것과 견줄만한 역량을 갖추게 됐음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 볼 때 해방 이전 학문(지식)장은 극도의 불균형성을 보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유일의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도 서울에 있었고 각종 전문학교도 대부분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지방에서는 평양에 세 개의 전문학교와 한 개의 사범학교가 설립됐지만 서울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지식인도 서울을 기반으로 지적 활동을 벌였다.


해방 직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그대로 유지됐다. 고등교육기관의 서울 집중 현상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46년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이 추진되고 남한에서는 국립종합대학으로 서울대 설립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설립을 계기로 이제 북한의 평양도 남한의 서울과 더불어 학문(지식)장으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설립은 많은 지식인이 월북이라는 선택을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김일성종합대학 설립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이전에는 지식인 특히 고등교육기관에 있던 교수가 남에서 북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경우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서울에서의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이하 국대안)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국대안 파동은 서울의 진보적 지식인이 남에 실망하고 진보적 학문이 가능한 대안적 공간으로 북을 선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북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그리고 뒤이은 흥남공업대학 등의 설립을 통해 남한 지식인에 대한 유치 공작을 강화하는 가운데 남에서는 국대안 파동에서 드러났듯이 진보적 지식인을 학문장에서 축출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많은 지식인이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서 가르칠 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교수 요원은 부족했다. 남과 북 모두에서 교수 요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됐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전문학교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북이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북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으로 남의 진보적 지식인을 초치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지식인의 대규모 월북은 한반도 전체로 봤을 때는 학문(지식)장의 재편을 가속화했다. 남한과 북한에 두 개의 학문 중심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지식)장의 재편을 체제 대립 또는 체제 간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분단 시대’라는 말 자체가 지금까지 자족적이고 완결된 하나의 체계라고 여겨지던 것이 사실은 ‘통일’된 상태로서의 더 완결된 그 무엇에 하나가 결여됐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남한과 북한에 출현한 두 학문(지식)장을 결국에는 빠진 부분을 채워나가는 통합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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