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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주해작업 속에서 탄생한 보석…이 책의 무게는?
번역과 주해작업 속에서 탄생한 보석…이 책의 무게는?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6.30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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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최성만 지음|도서출판 길|430쪽|30,000원

최 교수의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은 반성완 교수의 편역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 소개된 지 31년 만의 성과인 동시에 한 사상가의 수용시라는 측면에서도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 번역의 축적과 이에 이은 주해 작업이라는 정석은 거듭 강조될 필요가 있다.

2012년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국문학)가 <상허학보>와 <민족문학사연구> 두 학술지 논문에 분기별로 자주 출현한 외국인 저자와 빈출 외래서적까지를 추적했을 때,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가장 많이 인용된 이론가는 발터 벤야민으로 조사됐다.

벤야민에 대한 관심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재조명 학술대회도 열리기까지 했다. 과연 벤야민이 한국 학계와 한국사회에 이렇게 호명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독문학)가 내놓은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은 그런 의문에 충분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벤야민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란 글이 회자됐다. 이후 반성완 한양대 교수가 편역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83)이 오랫동안 독자들을 만났다. 이어 베르너 풀트의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 1985), 베른트 비테의 『발터 벤야민』(역사비평사, 1994. 이후 이 책은 2001년 한길사에서 새로 나왔다) 등 벤야민 전기가 소개됐다. 회상록도 선보였다. 게르숌 숄렘의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책들은 2차자료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본격적인 소개는 2000년대 중반에 와서 시작됐다. 미완으로 남았지만 후기 벤야민의 主著라 할 수 있는 『파사주』 프로젝트(『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가 2005년에 출간됐고, 이어 2007년에는 모두 10권으로 기획된 『벤야민 선집』(도서출판 길. 이 선집은 원래 10권으로 기획됐지만 15권으로 늘어났으며, 2014년 현재까지 여덟 권이 출간됐다)의 첫 권이 나왔다. 2009년에는 벤야민의 초중기 주저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한길사)이 소개됐다. 그리고 2014년, 벤야민 저작의 저류를 읽어내면서 그의 사상을 조명한 연구 결실이 책으로 나왔다. 최성만 교수의 책이다. 

최 교수는 “이렇게 주요 저작이 완간되면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벤야민의 사상을 토론하고 수용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머리말에 썼다. 그런데 한 가지 필요한 일이 있다. 바로 ‘벤야민 전문가’들의 한국적 수용과 평가다. 문제적 사상가의 저작을 구비하는 일과 함께 벤야민에 대한 한국적 읽기가 병행되지 않으면 자칫 벤야민은 미로와 같은 존재로 남을 수도 있다. 최 교수의 작업이 의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책은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면서 시작해 초기의 언어철학과 미메시스론(2장), 비평과 정치(3장), 문학투쟁의 전략가(4장), 망명기의 글들(5장), 현대의 고고학(6장) 순으로 구성했다. 한국에서 벤야민 번역과 수용의 역사에 대한 보론도 덧붙였다. 이 ‘보론’부터 먼저 읽고 벤야민 사유의 흐름을 저자의 호흡에 맞춰나가도 좋을 것 같다. 얼핏 보면 ‘전기적 접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저작들을 중심에 놓고 벤야민 사유의 특징과 흐름을 읽어내고 있는 방식이다. 

저자에 따르면, 벤야민 사유의 특징은 초기부터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이 맞물려 있다. 2008~2011년 국내 현대문학 연구자들이 벤야민을 호출한 데는 바로 이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의 용광로에서 모종의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욕망이 작용한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분명, 이러한 문학 연구자들의 욕망은 저자가 내놓은 이 미래의 책에 의해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 벤야민의 사유 세계 전반에서 보이는 종합과 긴장의 관계를 통한 변증법적 사유의 특징을 강조한다. 예컨대 벤야민이 말하는 ‘미메시스(mimesis)’는 우리가 이해하는 단순한 모방과 흉내내기의 의미를 넘어선다. 또한 정치는 현실정치가 아니며, 예술은 기술과 대립되는 자율적 예술이 아니다. 신학은 세속과 단절된 신에 대한 사유와 지식의 집적물에 멈추지 않는다. 벤야민은 신학이 그것과 인접한 것처럼 보이는 마법보다는 실제로 세속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세속적인 것은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정치의 영역이다. 이렇게 정치와 신학은 전혀 다른 영역이면서도 변증법적으로 매개된다. 그래서 저자는 “벤야민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러한 변증법의 과정을 뚫고 나간다는 것, 각 요소가 양의성을 띠고 ‘상호 침투’하며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것을 전제로 한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상가와 견줘 볼 때 벤야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초기의 사유가 나중에 일부 변형을 거치기는 하지만 후기까지 지속된다는 점, 둘째, 이 사유는 그가 그때그때 비평에서 다루는 작가나 작품과 긴밀하게 연관돼 이뤄진다는 점, 셋째, 거듭 등장하는 사유 모티프들이 글마다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둘째와 셋째 특징 때문에 벤야민의 사상은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바로 그 특징 때문에 그의 글들을 읽어가면서 사유 모티프들이 섬세하게 연결되는 것을 흥미롭게 추적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가 읽어내고 강조했듯, 벤야민 사유의 특징은 형이상학적·신학적 사유가 유물론적·정치적 사유와 역사철학적으로 은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이 연결 고리는 무엇보다 언어, 예술, 기술과 같은 매체들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모든 비평문과 에세이에서 이 연결 관계를 추적할 수 있고, 그 점이 바로 그의 사상이 지닌 인문학적 토대와 현재성을 드러내 준다. 우리가 벤야민을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을 통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좌표를 읽고 행동하는 데 지침을 얻기 위해서다.”

벤야민이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가져와 역사의 천사를 역설했던 것처럼, 저자 역시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맨 끝에 놓고 ‘기억의 정치학’을 강조한다. 책 제목이 어째서 ‘기억의 정치학’으로 명명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역사에 관한 벤야민의 테제들은 한마디로 역사를 실증적 사실자료를 다루는 과학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대신 기억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요구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역사관에서 기억·신학·정치(행복)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요소들로 서로 호응한다”라고 지적하면서 “벤야민의 역사철학의 특징은 그것이 기억의 정치학(실천)으로 수렴한다는 점이다”라고 읽어낸다. ‘기억의 정치학’이 중요한 까닭은, 저자의 말마따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역사를 바꿀 실천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최 교수의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은 반성완 교수의 편역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 소개된 지 31년 만의 성과인 동시에 한 사상가의 수용사라는 측면에서도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작 번역의 축적과 이에 이은 주해 작업이라는 정석은 거듭 강조될 필요가 있다. 전집을 염두에 둔 ‘선집’을 지속적으로 꾸려왔다는 것, 사상의 단편이 아니라 전모를 읽어낼 수 있는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 위에서 텍스트 중심의 연구서가 피어났다는 것은 다른 사상가 연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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