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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匠人들의 고군분투 새겨진 그의 은빛 칼날이 반짝이다
1세대 匠人들의 고군분투 새겨진 그의 은빛 칼날이 반짝이다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6.08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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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28. 粧刀匠 박종군(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 한땀 한땀 노력을 기울여 만든 장도를 자부심 깃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박종군 장도장.

정신적 지조를 상징하면서 문화적 가치로 승화된 게 우리의 전통 장도입니다.
장도는 도구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一片心의 정신이 중요하지요.
도덕적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장도는 바르게 살기위한 칼, 나쁜 마음을 도려내는 칼입니다.

장도라는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무형문화재는 국가로부터 命을 받은 책임이 있습니다.
장도 일도 중요하지만, 전수교육이든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교육이 중요합니다.
교육과 전수에 대한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12년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우리 영화계를 강타한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우리 무형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되새겨주는 한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중전 역을 맡은 한효주가 지니고 있는 銀粧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 속 은장도는 중전과 광해군 대역으로 나오는 하선(이병헌)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중전의 일심과 정절을 상징한다. 영화 속 은장도는 섬세한 세공과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우아한 기품을 지녔지만, 강한 내면을 지닌 중전의 캐릭터와 어우러지는 효과를 나타냈다. 영화를 통해 ‘한효주 은장도’로 알려진 이 은장도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박종군 粧刀匠(52)의 작품이다. 우리 粧刀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이다.


장도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한다.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 해 佩刀라고도 했으며,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해 囊刀라고도 했다. 장도라 하면 곧잘 은장도가 연상돼 이것이 여성들이 순결을 지키는 도구로 알려졌지만 사실 옛 전통사회에서 장도는 성인 남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몸에 지니던 필수품이었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정신적 지조, 즉 절개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사대부의 성인이면 허리띠나 주머니 끈에 매달아 일상적인 소지품으로 휴대하고 다녔다. 바깥 출입을 하거나 소소한 집안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장도는 요긴한 연장이었다. 야외에서 나뭇가지를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기도 하고, 과일을 깎는 데도 쓰였다.

‘광양 장도’의 맥을 이어가는 2대째 인간문화재
조선시대 왕실용으로는 京工匠으로서 상의원에 소속된 6명의 장인이 왕실 소용의 장도를 전담 제작했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됐던 장도는 광양과 곡성, 울산, 영주, 울진 등 전국에 분포된 私匠들에 의해 충당됐다. 한편으로 조선시대 여인들은 ‘장도노리개’와 같이 장식용으로도 장도를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만 만들어지고, 볼 수 있었던 장도는 단순한 도구, 혹은 호신용의 무기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종군 장도장은 아버지에 이은 2대째 인간문화재로서, ‘광양 장도’의 맥을 알뜰하게 이어가고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장도를 직접 만드는 한편으로 장도에 담긴 정신을 국내외적으로 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에게 장도는 어떤 것인가 그게 우선 궁금했다.
“장도는 도구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정신이 중요합니다. 바로 一片心이지요. 도덕적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장도는 바르게 살기 위한 칼, 나쁜 마음을 도려내는 칼입니다. 남을 헤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본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장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한 칼입니다. 예술이지요.”
정신적 지조를 상징하면서 문화적 가치로 승화된 게 장도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예술적 가치가 더해진다. 기능면에서 호신용과 장신구로 나눠지지만 여기에 예술적 가치가 더해지는 게 우리 장도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의 것에는 문구와 산수, 누각, 운학, 박쥐 등을 새기고 여인의 장도에는 꽃나무, 나뭇잎, 국화, 난 등을 새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술적 품위를 더 높여주는 것이지요.”
박 장도장에 따르면 장도가 몸에 지니는 것인 만큼 장도집과 칼자루를 호사스럽게 꾸미는 것은 자연스런 추세이기도 하다는 것. “금, 은, 蜜花, 玳瑁, 상아, 수정과 같은 진귀한 재료를 비롯해 뿔과 牛骨, 화류와 먹감나무 등을 이용해 겉치레에 치중해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에 치중한 장도는 하나의 예술적 작품입니다.”
전남 광양 출신인 박 장도장은 광양 장도의 전통을 이어 이곳 ‘광양장도전수관’을 지키고 있다. 전수관은 그의 아버지로, 초대 장도장 인간문화재(1978년 지정)였던 박용기 선생(83)이 필생의 사업으로 ‘광양장도박물관’과 함께 마련한 곳이다. 박용기 선생은 아들인 박종군이 2011년 2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명예보유자로서 아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다.

사실 오늘 장도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배경에는 아버지 박용기 선생의 노력과 공로를 빼 놓을 수 없다. 박용기 선생은 광양에서 태어나 14세 때 佩刀 장인이었던 故 장익성 옹에게서 장도 일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 전통의 맥을 잇는 장도 일은 힘들었다. 워낙 힘든 일이라 5명의 도제 중 4명은 떠나고 선생만 남았다. 당시 장익성 옹 역시 워낙 고령이라 곧 세상을 떠났다. 박용기 선생은 그런 환경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며 장도의 명맥을 지켰다. 1975년 현 전수장 자리(광양읍 매천리)로 공방을 확장하면서 훗날 광양에 장도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다지면서 장도 일에 매진, 1978년 인간문화재가 된다. 2005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광양시에 기부 채납하는 조건으로 나라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박물관 건립이 현실화된다.
박종군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미대에 진학, 대학 4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장도 작업에 참여했고, 27세 때인 1989년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돼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장도의 정신과 기술을 익혀나갔다.


박 장도장은 “늦게 시작한 만큼 부친의 위업을 그대로 전수받기 위해 장도와 관련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면서 새로운 장도장으로서 작품 방향을 설정하고자 노력을 다 했습니다”라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사실 부친께서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됐을 때만 해도 장도뿐만 아니라 모슨 전통공예의 맥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무형문화재 1세대 장인들의 스승과 그 윗대 스승의 계보를 알 수 없는 상태였지요. 일제 강점기의 문화말살정책 탓도 있지만 장인이라는 직업을 천시하던 시대였기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장도장 1세대인 아버지 시절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마음가짐이 단단하다.
“아버지를 비롯한 1세대 장인들이 처한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기술의 보존과 자신의 생존을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저 역시 거기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장도 만드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하는 것이기에 방심과 게으름, 적당주의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금속 열 풀림이나 녹이는 일, 형태잡기, 그리고 새김질 일뿐만 아니라 모든 과정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도의 정신력이 요구되는 만큼 한시의 방심은 모든 일을 망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장도에 사용하는 금속재료로는 금, 은, 백동, 구리, 주석, 철 등이 있다. 금, 은, 백동, 구리 등은 주로 칼집과 칼자루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주석은 刀身의 刀心 부위의 받침 역할을 하는 데 많이 이용되며, 철은 연마해 도신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나무재료로는 흑단, 먹감나무, 대추나무, 향나무, 대나무, 심향목 등이 사용되고 기타 옥, 호박, 비취, 마노, 공작석 등의 보석류와 대모, 우골, 어피 등의 동물에서 추출한 재료들을 사용한다. 제작도구로는 금속을 열 풀림하거나 녹이는 기능을 하는 화덕과 공기를 주입시켜 불의 온도를 강약으로 조절하는 풀무, 장도의 장식과 부속품의 형을 잡는 데 사용하는 보래를 비롯, 거도, 토란, 모루, 물줄이, 쇠망치, 줄, 활비비, 받침대, 다듬목, 숫돌, 정, 가위, 집게, 칼대와 칼대받침목, 연장칼, 대패, 국화정과 납통, 불살개, 찌구, 나무망치, 도심꼬지, 깍쇠, 길이, 납인두, 갈기, 거름쇠, 실톱 등 다양한 도구들이 사용된다. 박 장도장의 광양 장도 전수관에는 작업장과 전시관, 학예연구 공간을 갖추고 있다. 생활공간까지 마련돼 있으니 그의 집터인 셈이다. 이와 함께 서울 가회동에 ‘광양은장도 북촌서울 공방’을 마련해 장도를 전국적으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리는 일에도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정부 지원 사업으로 박 장도장은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그 가능성을 엿봤다.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중전 역의 한효주가 지니고 있는 은장도. 박종군 장도장의 작품이다.

“파리에 갔을 때 저희 광양 장도가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장도문화와 비슷한 칼 문화가 있습디다. 그들이 저의 칼을 알아본다는 것이 기뻤지요. 해외에서도 문화 예술적으로 우리 칼이 그 가치를 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양의 장도 전수관과 박물관은 아버지의 정신과 노력이 깃든 곳이기에 이 곳에 기울이는 박 장도장의 정성은 각별하다.
“2006년 건립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정부도 문화의 중요성을 점점 알아가게 되자, 이 때다 싶었지요. 정부출연금 외에도 동산, 부동산 등을 포함한 사재를 모두 털었습니다. 지자체 예산도 투입돼 결국 전수관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수관에 기울인 아버지의 정성과 장도의 정신을 전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지요.”


광양의 장도박물관은 매년 수만 명이 다녀가는 광양의 명소다. 이곳에는 박용기 선생의 은장도 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또 장도장 작품과 우리나라의 오랜 유물 200여 점을 전시해 우리 칼의 역사적 발달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전시관 내 2층 벽면 대형부조를 통해 박용기 선생의 장도 제작 모습도 볼 수 있게 했다. 장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작업장과 주전시실 외에도 체험학습실, 세미나실, 전통문화명품숍, 카페테리아 등이 설치돼 있다.


“체험학습실에서는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옛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 전통을 배우며 자신의 소망과 꿈을 담는 사물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체험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게 박 장도장의 말이다.
이런 전수관과 박물관 등 전통문화공간을 개인적으로 운영해 나가기는 현실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많은 비용이 든다. 여기에 전시사업까지 진행하려면 더 많은 예산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비용이 든다고 해서 국민의 적잖은 세금으로, 전통문화 계승발전과 국민 문화생활교육을 위해 지어진 시설을 놀릴 수도 없는 일이다. 때문에 유지비를 위해 늘 신경을 써야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있다. “전수관은 작품을 팔아서 유지하는 상업갤러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제가 직접 여러 국가지원 사업을 위해 바삐 뛸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비롯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대중문화 콘텐츠가 우리의 전통문화재인 장도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박 장도장이 반길 일이다. 그가 만든 광양 은장도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한효주의 은장도’로 나온 것도 그 같은 연결 작업 중의 하나다. 박 장도장의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가 인간문화재이면서도 현실적인 상황을 전통문화와 연결시켜 시너지 효과를 올리는 장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는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인간문화재다. 그런 자세로서의 그의 결의는 다부지다.

전수관·박물관 통해 우리 장도의 예술성 세계에 알려
그는 지난 4월 장도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개행사를 광양 전수관에서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 박 장도장은 ‘아름다운 한국 장도의 美’을 주제로 자신의 예술혼이 담긴 작품인 연화문낙죽장도 10여 점과 이수자 및 문하생들의 칠보장도공예 작품 10여 점 등을 공개했다. 또 문화 향유의 취약지대를 무형문화재가 직접 찾아가는 ‘인간문화재 박종군 한국장도의 美’라는 순회행사도 가졌다. 그는 장인으로서의 책무와 함께 특히 장도 정신에 입각한 장도 기술의 전승을 강조한다.


“장도라는 우리의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 발전시켜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무형문화재는 국가로부터 명을 받은 책임이 있습니다. 장도 일도 중요하지만 전수교육이든,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교육에 대한 사명을 잊어선 안 됩니다. 장인은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화재 기능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며 사익을 챙기지 않는 삶 말입니다.”


장도장으로서의 박종군의 정신과 기술은 현재 아들 박남중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에 이은 3대째 대물림인 셈이다. 20대 초반의 박남중은 이미 이수자로 체계적인 수련을 쌓아 우리 전통문화유산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해 아버지를 돕고 있다. 박종군 장도장의 아내도 가세하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 정윤숙 씨의 장도 솜씨도 만만찮다. 이미 1992년부터 수련을 쌓아 현재는 명장 반열에 올랐을 정도다. 장도 일에 아버지를 포함해 온 집안이 ‘올인’하고 있는 형국이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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