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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이정표, 세월호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의 이정표, 세월호 이전과 이후
  • 교수신문
  • 승인 2014.06.0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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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선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인원 476명이 승선한 화객선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5월 29일 현재, 288명의 사망 사실이 확인됐고 16명이 아직도 실종 상태에 있는 이 비극적 참사의 상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이 참사 앞에서 우리는, 선실에 갇혀 있는 수백의 생명과 함께 세월호가 심해 속으로 침몰해가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무능함에 좌절했고 그 사고의 원인이 ‘총체적 부실’이라는 낡은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절망했다. 세월호의 침몰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낯선 외계인의 침입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환영같은 그 광경 앞에서 시간은 갑자기 정지하고 세계는 깊은 침묵에 떨어졌다. 그리고 삶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들에게 이 비극은 여전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반복하게 만드는, 아직도 믿기 힘든 비현실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누리는 삶의 안락과 안정이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환기하면서 삶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삶이 안고 있는 근본적 불안정성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돼 왔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산업화 이후 물질적 풍요를 이룩한 근대사회가 구조적 취약성에 노출돼 있는 불안한 ‘위험사회’임을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경고했다. 산업화에 근거한 근대사회를 지탱하는 물질적 부의 생산은 동시에 그만큼의 위험요인을 생산하는 과정이라는 것. 탐욕적인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만성적인 산업적 과잉 생산은 위험 요인의 증대를 의미한다. 물질적 풍요를 내세워 안락과 안정을 보증하는 문명화 된 삶의 정체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다. 알고 보면 문명이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밑빠진 독과 같은 수요’에 따라 스스로 작동하는 ‘자가 생산’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에게 있어 근대사회는 ‘유동하는 공포’로 가득 찬 세계다(『유동하는 공포』). 풍요와 안정을 보증하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문명화된 삶이란 망가지기 쉬운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시대의 재난은 예고 없이 별안간 우리를 덮친다. “문명의 외피는 종잇장처럼 얄팍하다. 어쩌다 한 차례의 동요로 우리는 균열 속으로 추락한다.” ‘타이타닉 콤플렉스’ 또는 ‘타이타닉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통해 그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타이타닉 신드롬’은 문명의 ‘종잇장처럼 얇은 외피’를 뚫고 ‘문명화된 삶의 기본 요소들이 여지없이 제거된 무의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공포”를 가리키며 “그것은 혼자만의 추락 또는 여럿이 함께 하는 추락이겠지만, 어떤 경우에든 ‘삶의 기본 요소들’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믿을 만한 의지처가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위험 요소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가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위험사회』와 『유동하는 공포』는 그것이 탐욕적인 자본의 논리와 물질문명의 신화에 대해 인간과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서 가능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번 참사에서 유족들이 쏟아낸 분노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들의 분노와 고통은 내가 누구인지를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소외된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에 대한 일부의 비난과 냉소는 한국사회라는 공동체의 균열상을 숨김없이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타인이 직면한 극한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이해와 공감을 나눌 수 없는 사회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체험을 담고 있다. 이 자전적 수기는 인간과 생명의 존엄함을 되돌아보게 해주는데 재난과 고통 속에서도 삶과 존재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모조리 박탈당한 고통의 한복판에서 자기 존재의 위엄을 회복해나가는 프랭클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직면했던 한계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게 했던 힘은 거창한 게 아니라 한 줌의 햇살과 맑은 공기가 전부였다.

그것이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의 절망감을 희망으로 바꾸고 삶에 대한 감사를 드리게 만들었다. 플랭클의 수기에 담긴 메시지가 그러하듯이 고통과 재난에 대한 인간의 기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 참사가 우리 사회를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라면 이 이야기는 고통을 직접 겪은 그 누군가에 의해 먼 훗날, 반드시 생생한 육성으로 기록돼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난의 경험에 대한 교훈이자 치유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영속하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임영봉 서평위원/ 중앙대 교양학부대학·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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