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8:25 (토)
식장산 호숫가에서 루소를 읽는 시간
식장산 호숫가에서 루소를 읽는 시간
  • 교수신문
  • 승인 2014.05.28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천 릴레이 에세이

일요일 오후, 식장산 호숫가의 연초록빛 버드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 바람에 날린 하얀 꽃잎들이 연못으로 내려앉는다. 수련의 새 잎들이 수면으로 올라오니, 새 한 마리가 시나브로 수런거린다. 그리고 저 멀리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슴이 벅차오른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였던 루소의 『에밀』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인간은 만물의 질서 속에 제자리를 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도 인생의 질서 속에 제자리가 있다. 어른은 어른으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 바라보아야 한다. (…) 자연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어린아이로 있기를 원한다. 만약 우리가 이 순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우리는 익지 않아 맛없는, 이내 썩어 버릴 설익은 과일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린 박사나 늙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다.”


루소가 살았던 18세기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당시 “태어난 아이들 중 기껏해야 절반 정도가 청년기에 이른다”라고 루소는 적고 있다. 실제로 18세기에는 태어난 아이 중 43퍼센트만이 세 살까지 생존했다. 또한 파리 사람의 평균 수명은 23.5년이었다. 1758년의 파리 고아원에는 5천12명의 유아가 수용됐으나, 수용 직후에 1천479명이 사망하고, 유모에게 맡겨진 후 다시 2천270명이 사망, 불과 수개월 사이에 모두 합치면 74퍼센트라는 사망률을 보였다. 18세기에 태어난 아이 중 절반 가까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고, 그들의 짧은 생애 전체가 쓸데없는 얽매임과 매질로 망가졌다.


루소는 당대의 아이들이 겪었던 불행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장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과 불행을 아이들이 감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한번 그렇게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리고 회복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는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인간의 어린 시절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가! 인생에서 처음 4분의 1은 어떻게 인생을 활용해야 하는지 체 알기도 전에 흘러갔고, 그 후 마지막 4분의 1 역시 인생의 즐거움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지나가 버린다. 처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전혀 모르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젠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최초 시기와 최후 시기 사이에 끼인 기간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의 4분의 3은 수면, 노동, 고통, 억압 등 온갖 종류의 괴로움으로 소진된다. 인생은 짧은데, 그 이유는 우리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밖에 못 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중에서도 인생을 향유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교육자와 부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른다.


“어린 시절을 사랑하라. 또한 어린 시절의 놀이와 즐거움과 사랑스러운 본능을 마음껏 누리게 해줘라. 여러분 가운데 언제나 입가에 웃음이 맴돌고 늘 마음이 평화로운 이 시기를 때때로 그리워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왜 여러분은 곧 지나가버릴 그토록 짧은 그 시기의 즐거움을, 남용할 수도 없는 그토록 소중한 행복을 이 순진한 어린아이들에게서 빼앗으려 드는가? 여러분에게도 다시 돌아올 수 없듯이 그들에게도 되돌아오지 않을 그토록 빨리 지나가버리는 어린 시절을 왜 고통과 쓰라림으로 채우려 하는가? 아버지들이여, 그대들은 죽음이 언제 그대의 아이들에게 닥칠지 그 순간을 알고 있는가? 자연이 그들에게 부여한 짧은 순간을 빼앗음으로써 후회를 만들지 말라. 그들이 존재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곧 그것을 즐기도록 해줘라. 또한 신이 언제 그들을 부르든 그들이 삶을 맛보지도 못한 채 죽는 일은 없도록 하라.”


루소는 『에밀』에서 모든 교육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가장 유용한 규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시간을 절약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소비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이가 호기심을 키우고 시행착오와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기다리라는 뜻이다. 루소는 요컨대 아이의 신체는 아이의 시기에 충분히 활동시켜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있으나 정신은 가능한 한 방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자유로운 방임의 시간을 쓸모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에 관해서는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다가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구두쇠처럼 행동하지 말라. 최초의 시기에 시간을 희생하면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잃은 것 이상으로 그 시간을 되찾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유에 대한 존중은 지금의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피로 사회’, 즉 과업의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대한 근원적 경고이기도 하다.


여름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햇빛은 벌써 빙초산 같이 뜨겁다. 작열하는 땡볕을 피해 물병을 들고 찾아온 고즈넉한 호숫가에서 루소의 『에밀』을 다시 읽는다.
나는 그 행간 사이에서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우리들의 낡은 이기심을, 자기 뜻대로 아이를 조정하면서도 ‘그게 다 널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생각해 본다. ‘미래’라는 낱말 때문에 버려야 했던,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가치들의 서글픈 목록이 떠오르는 것이다.
‘제대로 된 어른’이 돼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마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았던 시대는 없었다. 과업과 간섭의 과잉주의로 인해 아이들의 신록 같은 꿈들이 그렇게 스러져 갔음을 다시 되새겨본다. 식장산 너머로, 저 물길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환하게 들려오고 있으니.

□ 다음 호 필자는 박아르마 건양대 교수입니다.



고봉만 충북대·불어불문학과
필자는 프랑스 마르크 블로크 대학(스트라스부르2대학)에서혁명과 반혁명-바르베 도르비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역사를 위한 변명, 악마 같은 여인들등의 번역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