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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태형’, 이제는 대천세계로 가시라
‘용태형’, 이제는 대천세계로 가시라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5.20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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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작고한 김용태 전 민예총 이사장

세월호 참사로 나라의 분위기가 무겁다. 그 애석한 죽음들의 와중에서도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뜨는 사람도 많다. 그 가운데 결코 소홀하게 여길 수 없는 訃告가 있다.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의 별세(향년 68세)가 그렇다. 우리 문화예술계, 특히 진보문화계라고 일컬어지는 민중 문화판에서 그는 ‘용태 형’으로 불렸다. 그만큼 그의 생각과 품은 넉넉했고, 그 손, 발짓은 넓었다. 그래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난 4일 지병으로 타계했지만, 아직도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을 이끌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자 일꾼이었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을 필두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운영위원(1984년), 민족미술협의회 초대 사무국장(1985년), 그림마당 ‘민’의 초대 총무(1986년)를 역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라가 통일이 돼 문화예술이 하나로 합쳐지고자 하는 일에도 진력을 다했다. 민예총 초대 사무처장(1988년), 코리아통일미술전 남측단장(199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2002년), 6·15 공동선언 남측위원회 공동대표(2005년) 등을 맡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1987년 대선 당시에는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한 것은 물론 그의 생각과 의지에 따른 것이겠지만, 주변에서 그를 도무지 가만두지를 않았다. 그만한 적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용태가 이런 ‘감투’를 탐냈을 리가 없다. 이런 일들을 도모하자면 ‘일꾼’이 필요했고, 김용태는 스스럼없이 나서서 일을 맡는 ‘일꾼’이었다.


그러나 김용태는 이런 ‘일꾼’이기에 앞서 예술인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DMZ」는 시대적 상황을 떠나 아직까지도 경이로운 작품으로 회자된다. 의정부, 동두천 등 미군부대 주변 사진관에서 모은 기지촌 여성들 사진을 수집해 만든 콜라주 형식의 이 작품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은 그리는 것이다’라는 통념에 젖어있던 미술계의 뒤통수를 쳤다. 작가 임옥상은 김용태의 「DMZ」를 높이 평가한다. 거기서 우리 민족 분단의 현실을 본 것이고 김용태의 사람됨을 안 것이다.


“분단의 비극, 처연한 현실 앞에 나는 말을 잊었다. 미군 병사의 품속에서 웃고 있는 우리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은 그대로 비수가 돼 가슴에 꽂혔다.” 작가 임옥상의 말이다. 임옥상은 김용태가 민중문화에 생을 바친 배경을 「DMZ」에서 고찰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이 사진을 모으며 기지촌을 배회했을 때 용태 형에게 미술은 한낱 배부른 자들의 유한취미로 비춰졌을 것이다. 세상은 사람을 움직여야 변한다고, 미술만으론 안 된다고 새기고 또 새겼을 것이다. 스스로 붓을 꺽고 현장에 뛰어 들었던 낭만적 혁명가 김용태 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김용태는 사람을 움직이는 게 더 큰 작업이라 생각했고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없었던 민중예술계에서 활동가로 자임하면서 그 일에 진력을 다 했던 것이다. 김용태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백기완은 이런 말을 했다. “용태형은 마땅히 들풀임을 살아왔다. 그의 삶, 그의 투쟁, 그의 역사가 곧 거대한 예술이 아니던가.”


지난해 12월 김용태의 넉넉한 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병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투병소식을 듣고 그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모여든 것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김윤수 민예총 초대 공동의장, 언론인 임재경,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신경림 시인,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 소설가 황석영, 문학평론가 구중서 등 문화예술인 80여명이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용사모)’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지난 3월 26일 김용태가 즐겨 불렀던 「산포도 처녀」를 패러디 해 그를 좋아하고 따르던 지인들의 글을 모은 『산포도 사랑, 용태형』(현실문화 刊)을 펴냈고, 작가 43명의 작품 100여점을 모아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한 바로 그날인 4월 16일 병세가 깊어지면서 다시 병원으로 갔다. 그는 ‘난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유홍준 교수는 못내 아쉬워한다.“불사조 같은 용태형은 아마도 일주일만 지나면 인사동에 다시 나타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 얼굴을 마주치면 ‘야, 이 사람 누구야’라며 반갑게 손을 내밀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의 민중과 민중예술을 사랑하는 소박한 삶과 죽음을 아쉬워하는 장례는 그의 생애답지 않게 좀 ‘역설적’이었다. ‘민족예술인장’으로 지난 7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정헌 서울문화재단이사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계를 망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자문위원을 맡았다. 춤꾼 이애주는 弔辭에서 “뿌려놓으신 성성한 기운과 생생한 정신이 살아 숨 쉬며 점점 빛을 발하고 있다”라며 그의 이른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굽이굽이 돌아 넘실거리는 진도바다를 거쳐 모든 고통과 절망을 껴안고 대천세계로 나아가시라”며 그를 보냈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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