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9-16 17:43 (월)
사랑은 어떻게 후기자본주의 정치경제학과 공모하게 됐을까
사랑은 어떻게 후기자본주의 정치경제학과 공모하게 됐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4.04.23 18: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바 일루즈의 감정사회학과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 에바 일루즈
일루즈의 접근은 감정사회학의 본유적 의미에서 보면 여전히 구조주의적이거나 문화구성주의적이다. 좀 더 감정사회학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찰과 분석이 요구된다.

역사학자나 문화사가들의 작업에 비하면 사회학자가 ‘사랑’을 테마로 연구한다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은 줄곧 ‘주관적·생리적·심리적 경험’이자 사적 삶의 영역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는 점에서 사회학자의 시선에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간 기든스, 벡 부부, 페더스톤, 바우만 등 몇몇 사회학자들은 사랑 혹은 친밀성의 문제를 현대성과 관련해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기여해 왔다. 그럼에도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사랑과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박형신·권오헌 옮김, 이학사, 2014)은 앞서 언급한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비해 더욱 사회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사회학의 두 층위, 즉 문화적 차원과 정치경제학적 차원을 끌어들여 감정의 차원, 즉 후기근대적 사랑의 관행(practice)을 매우 실증적인 방법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루즈의 접근은 문화-감정-정치경제학을 이론적·방법론적으로 결합시킨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그녀가 문화사회학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전통을 이어가는 노력의 소산이기도 하다.


일루즈는 20세기 전환기부터 현 시점까지 미국사회의 낭만적 사랑이 거쳐 온 역사를 자본주의 변동 과정과 사회계급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읽어낸다. 특히 빅토리아시대의 로맨스 관념과 관행이 후기자본주의사회(일루즈는 이 시기를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설정한다)에서 어떻게 전환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으로 들어서는지를 분석한다. 일루즈에 따르면, 빅토리아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낭만적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하고 원초적인 본능을 승화시키고 영혼을 고상하게 하는 종교적 감정”에 가까웠다. 사랑은 도덕 내에 갇혀 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이러한 ‘종교적 구심성은 쇠퇴하고 낭만적 사랑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됐다. 세속화는 대중문화가 출현하면서 가속화됐고 이 과정에서 낭만적 사랑은 미국인의 삶에서 하나의 신화로 전환되는 이중적 결과를 낳았다. 이제 로맨스는 일상생활에서 종교를 대체했고, 점차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측면에서 정의되는 행복 추구의 중요한 동기로 제시됐다. 사랑은 개인적 행복 또는 자기 긍정과 등치됐다.


낭만적 사랑은 개인적 차원에서 상실된 에덴동산의 회복과 유토피아적 이상의 구현으로 여겨짐으로써 개인의 해방, 사심 없음, 풍요로움, 희생,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펼쳐지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제공한다. 이러한 낭만적 사랑은 자본주의사회의 차가운 논리, 즉 상품화, 이윤추구, 계산 합리성에 대항하는 ‘위반의 아우라’이자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일루즈는 빅터 터너의 경계성(liminality) 개념에 입각해 낭만적 사랑은 경계적인 것을 경험하게 하고(사회질서의 경계적 전도이자 공리주의적 가치에 대한 저항), 유토피아에 접근할 수 있는 감정적 공간을 창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루즈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유토피아는 철저하게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 가치, 계급 관계에 의해 틀지어지며, 시장을 통해 끊임없이 재창출된다고 주장한다. 시장이 낭만적 사랑을 빠르게 흡수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은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뜨거운 순간’(강렬함, 위반, 열정)과 ‘차가운 순간’(실용성, 합리성, 이해관계)이 공존하는 모순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차가운 순간’과 공존하는 ‘차가운 순간’의 역설
20세기 초반부터 성장한 대중문화와 여가 및 소비생활은 ‘상품의 낭만화’와 ‘로맨스의 상품화’ 과정 속에서 낭만적 유토피아를 창출해낸다. 빅토리아시대의 사랑이 지닌 ‘고통, 장애, 난관’의 의미는 후기자본주의적 문화에서 대중문화를 통해 ‘쾌락, 흥분, 강렬함’의 의미로 전환됐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영화와 광고 이미지 속에서 상품이 낭만적 아우라를 획득하는 방식, 즉 상품의 낭만화 과정과 여가와 소비활동을 통해 로맨스를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 ‘소비’를 통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낭만적 사랑의 계급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가장 대표적으로 데이트 관행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된다. “소비한다. 고로 로맨스가 존재한다”. 일루즈는 다니엘 벨이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낮에는 금욕주의, 밤에는 쾌락주의)에 입각해, 낭만적 사랑은 “소비 영역과 생산 영역 간, 탈근대적 무질서와 여전히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노동 규율 간, 무계급적 풍요의 유토피아와 ‘구별짓기’의 동력 간의 모순들을 결합하는 응축하고 있는 장”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낭만적 유토피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더욱 시장의 논리(여가와 소비)에 따라야 하며, 그만큼 고된 노동(자기통제)이라는 대가를 치러야한다. 이러한 모순은 사회과학, 심리학, 의학적 담론에 기대고 있는 치료 요법 담론에 의해 해소된다. 쾌락을 추구하되 상대방과의 ‘대화·협력·상호작용’하는 기술 또한 익혀야 한다. 사랑은 고단한 노동의 일부가 됐으며, 소비윤리와 밀착되어 있는 감정적 실천이 됐다. 여행, 외출하기, 데이트 등 돈을 지불해야만 낭만적 유토피아로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사적인 가족생활에서도 로맨스는 일정한 비용을 지출해야 가능하다. 일루즈에 따르면 “낭만적 이상이 소비 자본주의의 민주적 이상을 반영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반면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불평등은 낭만적 유대 그 자체로 이전됐다. 근대의 낭만적 사랑은 시장으로부터의 ‘안식처’가 되기는커녕 후기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과 긴밀히 공모하고 있는 하나의 관행이다.”


한편 일루즈는 감정의 정치경제학을 넘어 감정의 문화사회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자신이 직접 실시한 인터뷰 자료를 중심으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간의 낭만적 사랑의 실천 전략, 즉 ‘구별짓기’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낭만적 사랑을 계급적 차이에 따라 어떻게 소비하느냐의 문제는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을 통해 잘 포착될 수 있는데, 일루즈는 로맨스 관행이 ‘여가 추구에 투자할 잉여 소득과 시간, 각 유형의 여가를 소비하는 데 요구되는 중상계급의 올바른 매너에 대한 지식과 관행’과 엮이면서 계급별 구별짓기가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낭만적 사랑은 여가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사회계층 간의 서로 다른 신분적 지위를 드러내는 소비행위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계급이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된 낭만적 레퍼토리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거나 흉내기에 급급하다면 중상계급은 그것을 비꼬거나 정반대로 전유한다.


그렇다면 일루즈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는 1) 사적 삶의 영역과 상품교환은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차하며, 2) 로맨스는 우리의 사회구조에 불평등하게 분포된 하나의 재화이고, 3) 사랑은 일터에서 이미 일정 정도의 객관적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개인적 자유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낭만적 유토피아는 소비자본주의가 창출해낸 문화적 레퍼토리에 따라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소비된다.

감정과 문화의 관계 설정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제기되는 주장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경험해왔거나 현재에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색다른 주장이나 발견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은 사회이론적 자원을 풍부하게 활용하면서 현실세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풍부한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에 있다. 이 같은 방법론은 일루즈가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뢰르적 방법을 끌어들임으로써 논의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이 책의 묘미는 사랑에 대한 독특한 이론화 작업뿐만 아니라 그의 자료활용 능력과 서술방식에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일루즈의 접근방법은 감정사회학 분야 중에서도 감정의 문화사회학과 감정의 정치경제학에 가깝다. 이렇게 굳이 구분하는 이유는 감정과 문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연구의 방향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일루즈에게 있어서 문화는 감정에 앞선다. 감정은 ‘미분화된 일반적·생리적 각성상태’로서 이는 특정한 문화적 프레임과 결합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감정은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문화를 구성하는 원초적 에너지이다. 이 문제를 일루즈는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 즉 감정은 사회적 관계와 맥락적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상이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은 감정사회학의 본유적 의미에서 보면 여전히 구조주의적이거나 문화구성주의적이다. 좀 더 감정사회학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찰과 분석이 요구된다. 일루즈가 책의 전반부에서 밝히고 있듯, 자신의 연구대상이 된 미국의 백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는 명확해 보인다.


 


정수남 서울대 박사후연구원·사회학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아주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감정의 거시사회학』 , 『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 등을 번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