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은 프랑스 사회에 문화적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생각과 감수성이 열리던 시기였다. 이른바 ‘프랑스 이론’이라는 사상적 흐름도 이 시기에 표출된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러한 68세대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파리가 아닌 튀니지에서 그 해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디 부 사이드에 정착했던 유럽 지성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카페 드 나뜨에 단골로 드나들던 이는 미셸 푸코였다. 그의 철학은 광기와 성의 역사를 다뤘지만, 푸코는 사랑하는 연인이 튀니지로 군입대를 배정받게 되자 그를 따라 프랑스 교수직을 버리고 튀니지행을 결심할 만큼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다. 푸코는 1965년 인문과학고등교육원 부원장 임명이 좌절되자 미련 없이 튀니지로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튀니지 대학에서 가르쳤던 3년간 푸코는 튀니스에서의 학생운동으로 위험에 처한 자신의 학생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의 문서가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당시 시디 부 사이드에 있었던 자신의 저택 정원에 묻어놓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대중의 정치성에 대한 튀니스에서의 직접 경험 (혹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한계 경험’)은 그가 억압과 감시의 체제에 맞서는 지식인으로 형성되는 데 일조했음을 그는 훗날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히곤 했다. 그가 이 시기에 처음으로 삭발을 감행했다는 것, 비로소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지식인 아이콘의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도 물론 시디 부 사이드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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