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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拓’ 대출현황 등 새로운 발굴 자료로 그려낸 蓄積 경로
‘東拓’ 대출현황 등 새로운 발굴 자료로 그려낸 蓄積 경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4.01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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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오미일 지음|푸른역사|444쪽|25,000원

염상섭의 빼어난 장편소설 『삼대』(<조선일보>, 1931, 1.1~9.17)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조의관이란 인물이 富를 축적하는 과정을 내장한 문제적 소설이다. 소설에 그려진 조의관은 ‘부재대지주’로 2천150석 규모의 토지, 1만7천원 가량의 예금에 네 채의 집을 보유하고 있으며, 정미소도 하나 운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조의관의 정확한 재산 규모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의 아들 조창훈의 말에 따르면 아비 조의관이 10여 채 정도의 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정미소도 줄잡아 현금 2~3만원 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부를 축적한 조의관(과 그의 가계)이지만, 그는 ‘자본가’로 성장하지 못했다. 작가 염상섭은 어째서 그가 식민지 자본가로 성장하지 못했는가를 세밀하게 추적하진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대입해보면 흥미 있는 대목을 만날 수 있다. 마르크스의 말을 가져오면, 소설 『삼대』의 조의관은 단순한 ‘貨幣退藏者’에 지나지 않는다.

조의관은 그 엄청난 돈을 자신 외에는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벽장 속 금고’에 가둬놓음으로써 자본의 유통 과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운동만이 그의 진정한 목적으로 될 수 있다. 이 절대적 치부의 충동, 이 정열적인 가치추구는 자본가와 화폐퇴장자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자본론 Ⅰ』,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 조의관은 단지 ‘자본가의 유충으로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 식민지 시대의 단순 화폐소유자에 불과했다.

소설 『삼대』와 현실의 자본가들
『삼대』의 조의관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오미일 부산대 한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의 책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때문이다. 소설 속 조의관은 ‘자본가의 유충’으로,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기형적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본가 연구로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오 교수는 식민지 현실에서 자라난 한국 자본가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 그의 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전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물음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앞의 문제들에는 그간 소홀하게 다뤄진 감이 있다.


‘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라는 책의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공장과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한 근대 자본가들의 경제적 실천과 사회정치적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究明하는 데 주춧돌 하나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12년 전인 2002년 『한국근대자본가연구』를 상재하면서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오 교수는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해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 책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이로써 서로 다른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를 엿볼 수 있게 됐다.


소설 『삼대』의 조의관은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지만, 그 출신은 미미하다. 그가 족보 세탁에 나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초기 자본가들의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대개 무반 출신이나 문벌양반가의 후손이 관료로 진출하지 못하고 쇠퇴하면서 호구지책을 위해 변신한 관부조달영업자, 실무 하급관료와 시전상인, 객주 등이 근대적 기업가로 성장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주적 배경을 토대로 한 일부 관료 출신이 상업적 농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기업가로 변신하거나, 상인층이 개항과 정변·정쟁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자본 축적의 기회를 포착해 기업가로 성장하는 경우가 한국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로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경로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이 있다. 저자는 바로 이들을 주목했다. 오 교수는 그러한 자본가들 가운데 일제 시기 최대 부호로 꼽혔던 민영휘·민대식·민규식 일가,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 전북 지역 최대 지주였던 백남신·백인기 부자, 목포·광주의 대표적인 대지주이자 기업가였던 현기봉·현준호 부자, 화신백화점 창업주 신태화, 부산의 민족자본가 안희제, 그리고 평양의 이승훈·이덕환에 주목한다. 이들은 신분과 사회적 배경, 또한 자본가로서의 성장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생각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저자는 당시 언론기사나 광고뿐만 아니라, 특히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출자료를 발굴해 해당 자본가들의 보유 증권 내역이나 자산 현황, 그들이 설립한 기업의 사업계획서, 자산신용조사서, 대출현황, 손익계산서 등을 토대로 그들의 다양한 자본 축적 방식과 궤적을 추적했다.

민족경제권 건설 노력에 대한 평가
저자는 신분과 사회적 배경, 자본 축적 경로 등을 기준으로 초기 한국 자본주의 주도세력을 △ 관료 출신으로 기업 설립에 참가한 유형 △ 상업 활동과 무역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기업에 투자한 상인층 △ 재래업종에 종사한 수공업자, 혹은 기술자로서 소규모 제조 업체를 경영하며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유형 등으로 범주화했다.


민영휘 일가는 바로 관료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경우이며, 윤치소는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한 인물이다. 백남신 부자는 관부물자 조달과 수세 청부로 자본을 축적했다. 호남은행장이었던 현준호는 간척과 증미계획에 몰두함으로써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신태화는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했다. 안희제는 민족자본가의 전형이었다. 대략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저자 오 교수는 “개항 후 초기 한국 자본주의는 관료 출신 혹은 어용상인층 등에 의해 주도됐다. 권력과의 결탁에 의한 자본 축적은 이후 일제의 산업·금융 정책에 동승하는 방식으로 연장됨으로써 강한 예속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와 대조적인 민족경제권 건설을 위해 노력한 안희제와 민족기업을 설립·운영했던 이승훈의 경제 활동을 긍정적으로 읽어냈다. “국내 수요를 감안해 대량생산체제를 지향했고, 또한 일본인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소자본의 열세를 소액 주주 모집과 주식회사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그래서 오 교수는 “비록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사업체를 오래 경영하지는 못했지만 이 같은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라고 지적한다. “그들의 경제활동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연원을 묻는 지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이나 독립운동과 같은 그 사회정치적 활동과 함께 무거운 의미로 기억해야 할 유산”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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