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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활갯짓… 靜中動의 전통무예 그 속에 용트림치는 韓國人의 혼과 얼
유연한 활갯짓… 靜中動의 전통무예 그 속에 용트림치는 韓國人의 혼과 얼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3.04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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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22. 택견, 鄭景和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기능보유자(충주택견전수관장)

택견의 근본원리는 유연성과 음악적 리듬에 있다. 이는 택견의 기본동작인 품밟기와 활갯짓의 독특한 몸놀림에서 나온다. 겉보기에는 탈춤과 같이 굼실거리며 부드럽게 춤추는 것 같지만 부드러움 안에서 나오는 힘으로 상대방을 일시에 절명시킬 수도 있는 외유내강의 무예가 바로 우리의 택견이다.

2011년 11월 28일은 우리의 전통 무예가 전 세계적으로 빛을 발한 날이다. 이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날아든 소식은 우리의 전통 무예인 택견이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택견이 중국의 쿵푸나 일본의 가라테를 제치고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배경에는, 택견이 공격성이 강한 외국무술보다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놀림 속에 강인함이 깃든, ‘지키는 무술’이라는 차별화된 가치가 있고 이게 유네스코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택견은 주지하다시피 부드럽고 유연한 동작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우리나라 전통무술이다. 택견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무술로서 행해졌는지, 또 택견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의 舞踊塚과 三室塚 벽화에 택견과 유사한 동작을 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미 행해져 왔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高麗史』에 이의민과 두경승이라는 사람이 택견을 하는 구체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이 무렵 택견은 무술로서 다양한 기술과 함께 무인들 사이에서 이용되는 무예로 성장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대중화된 경기로서 널리 확대돼 무인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행됐다. 택견이라는 용어는 탁견에서 유래한다. ‘택견을 한다’로 ‘托肩’이라고 차자(借字) 표기한 것을 한자 그대로 음독해서 택견이 된 것이다.

택견은 그러나 조선시대 崇文賤武의 풍조로 쇠퇴하면서 그 명맥이 희미해졌고 이에 더해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핍박받는 무술로 전락한다. 일본은 한국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택견을 하는 택견꾼만 보면 잡아가곤 했다. 이 무렵부터 택견은 민중의 품을 떠나 산과 들에서 몇몇 택견꾼들에 의해 간간히 행해져 오다 그 후 몇몇 전승자에 의해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근대 우리 택견의 전승자로는 서울 종로 택견의 명인으로 일컬어지는 林虎를 꼽는다. 고종 19년인 1882년 생인 임호는 당시 왕십리 택견의 고수인 신재명과 함께 쌍벽을 이룬 것으로 전해지며 전통 택견의 전승자로 불린다. 임호의 택견은 그 후 宋德基(1987년 작고)로 전수되고 이어 辛漢承(1928~1987)으로 이어진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통무예 택견
전통 택견을 토대로 한 현재의 우리 택견을 체계적으로 완비한 분이 신한승이다. 그는 직접 전국을 돌며 택견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는 한편 이의 보급에 힘썼다. 그의 노력으로 택견과 그는 1983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됐고, 신한승의 제자였던 鄭景和(60)가 후계 전승보유자로서 현재는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근대 전통 택견의 연원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다. 서울지역에서 유행한 무예로 보는 시각과 충청북도 충주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무예라는 시각이다. 조선시대 평안도의 날파람, 경상도의 까기 등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의 무예가 존재했음을 감안할 때 택견도 지역성을 갖고 있는 무예지만 그 연고가 어딘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신한승이 1973년 충주에다 ‘택견전수교육관’을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현재 충주에 전통 택견의 4대 전승자인 정경화에 의해 택견의 전승과 연구를 위한 ‘택견전수관’이 설치·운영되고 있는 점에 미뤄 짐작해볼 수 있는 소지는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기능보유자인 정경화는 우리 전통 택견의 맥을 이어가는 택견의 명인이자 달인이다. 그가 택견에 입문한 해는 1973년이고, 그 계기는 당시 충주에 내려와 있던 신한승과의 만남이다. 당시 몸이 좋지 않아 산중에서 지내고 있던 정경화는 그 무렵 산중생활을 끝내고 집에서 요양하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택견을 알게 되고 신한승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정경화의 택견 입문 배경은 그의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경화는 신한승을 만나 그에게 택견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쉽지가 않았다. 스승은 두 달 동안 같은 동작만 되풀이 시킨다. 품밝기와 활갯짓이다. 품밝기는 혼자익히기의 삼각형을 그리며 동작을 취하는 기본자세(품)이며, 활갯짓 또한 품밝기와 함께 택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이다. 택견은 수련상에 있어 혼자익히기와 마주메기기(상대연습), 견주기(맞서기;대결) 세 가지가 있다. 혼자익히기에는 기본자세와 서서익히기(품밝기, 활갯짓, 발질과 손질), 나가며익히기(활개짓, 손질, 발질)가 있다. 이 두 동작만 두 달 동안 한다는 것은 지루하다. 스승은 이 두 동작이 택견의 생명임을 강조하면서 아무리 발차기를 잘 해도 이 두 동작의 독특한 몸놀림이 없으면 택견이 아니라고 지루해하는 정경화를 다그쳤다.


“재미가 없었지요. 그만두려다 ‘사내로서 시작했는데 끝까지 한번 가보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서 굼실거림 속에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무예’란 느낌이 왔습니다.”
스승의 지도 하에 수련과 수련을 계속했다. 발 기술이 나오고 걸이 기술이 나왔다. 춤추고 굼실거리는 속에서 공격과 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닦았다.


택견의 근본 원리는 바로 유연성과 음악적 리듬에 있다. 이 유연성과 음악적인 리듬 형성은 바로 택견의 기본동작인 품밝기와 활갯짓의 독특한 몸놀림으로부터 나온다. 태권도에 견줘 부드럽게 움직이는 독특한 몸놀림의 동작과, 차고 때리는 격술보다는 상대의 힘이나 허점을 이용해 차거나 걸어서 넘어뜨리는 동작을 기본으로 한다. 겉보기에는 탈춤과 같이 경쾌하면서 부드럽게 춤추는 것 같지만, 부드러움 안에서 나오는 힘으로 상대방을 일시에 절명시킬 수도 있는 외유내강의 무예다.


택견은 크게 서기택견과 결련택견 두 가지로 나뉜다. 서기택견은 방어 위주의 택견으로 위험한 기술을 배제하고 부담없이 서로 겨루는 맞서기를 말하며, 결련택견이란 殺手를 기본으로 해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공격적인 택견이다. 현재는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승부를 낼 수 있는 활수 위주의 서기택견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결련택견에는 必殺技를 포함한 12가지의 기본수가 전해지고 있다.


▲ 충주시 택견 전수관 입구
택견 기술을 열심히 연마하면서 정경화는 자신도 모르게 택견에 빠져든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놀림 속에 강인함이 깃든, 먼저 공격하기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면서 몸의 움직임에 따라 수동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강한 듯 부드러운 움직임에 매료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날카롭지 않으나 강인하면서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은 한국인의 심성과 닮은 것이기도 했다. 정경화는 1977년 택견 한 동을 입동했고, 1980년에 두 동을 입동한다. ‘동’은 택견의 승단을 의미하는 용어다. 택견의 최고 동은 아홉동이다. 정경화는 몇 동일까. 그에게는 동이 없다. 이미 고수의 경지에 오른 명인에게는 동이 붙지 않는다.


1987년 스승인 신한승이 세상을 떠난다. 그 사이 정경화에게도 일시적 신상의 변화가 있었다. 타 지역에서 취업을 하면서 택견에 전념할 수 없는 시기를 거친다. 그러다 직장을 충주로 옮기면서 스승의 지도로 택견을 계속 연마하고 스승과 함께 본격적인 택견 전승활동에도 나선다.
스승의 별세 후 홀로 남겨진 정경화는 스승의 유업을 잇기로 맹서한다. 어차피 스승의 뒤를 이어 우리 전통 택견의 미래를 짊어지게 된 운명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지요. 나마저 손을 놓는다면 택견은 또 그렇게 잊혀질 것이고 그 맥은 사라질 것이라는 강박감이 오히려 강한 의지를 돋우더군요. 스스로를 단련하고 택견을 굳건히 지키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정경화는 전국을 다니며 택견 명인을 찾아 겨루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고문서를 찾아 연구하며 택견의 원형을 수집하고 복원해 접목시키는 일에도 매진한다. 그 결과로 1995년 스승에 이어 제2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다.


충주를 전통 택견 원형보존과 전승의 터로 잡은 정경화에게 충주시가 화답한다. ‘택견전수관’을 그에게 지어주고 맡긴 것이다. 1997년 충주시는 국고와 지방비 22억 원을 들여 부지 2천69평, 연건평 291평 규모의 ‘택견전수관’을 건립해 충주를 택견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매년 가을 ‘택견전수관’에서는 택견 공개발표회가 열린다. 한 해 동안 갈고닦은 택견 실력을 선보이며 한국 전통무예의 지평을 넓히는 자리다. 매년 열리는 이 시연 발표회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우리 전통 택견의 원형보존과 이를 토대로 한 계승발전이다. 전통은 전통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택견 역시 올바로 전해지기 위해선 원형에 대한 연구와 이를 기반으로 한 정확한 기술교육이 우선이다.


“무형문화재는 한번 왜곡되면 두 번 다시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생명력이 끊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철저한 전수가 필요한 것이고 정기적인 전수 시연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게 중요합니다.” 충주 ‘택견전수관’에서는 매월 전국의 택견인들을 대상으로 한 ‘택견국가전수자교육’도 실시한다. 이 교육은 5년간 실시되는 강도 높은 교육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 국가 이수자 평가 대상자가 될 수 있다. 이 평가기간도 3년이다. 그러니 국가 이수자가 되기 위해서는 10년 정도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경화가 거친 과정은 물론 이보다 훨씬 엄격하고 험했다. 그래서 전수자를 대하는 정경화의 매무새는 간단치가 않다. 허술하게 배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현재 전국적으로 택견을 수련하고 있는 인원은 2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이수자가 나오고 전수자가 나온다.

각고의 택견 鍊磨 40년, 2대 무형문화재로 우뚝 서다
정경화는 우리 택견의 세계화, 국제화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올해 17회로, 매년 충주 ‘택견전수관’에서 개최하는 ‘세계무술축제’도 그 일환이다. 지난 2011년 정경화는 택견시연단을 꾸려 미국 땅을 밟았다. 미국에 택견을 소개하기 위한 것. 미국인들에겐 택견은 그야말로 낯선 ‘미지의 무술’이었다. 그러나 반응은 뜨거웠다. 부드러운 품밝기와 유연한 활갯짓 사이 날카로운 공격이 번득이는 독특한 무예 앞에 미국인들은 환호했고, 택견은 짧은 시연만으로도 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택견은 국경을 넘어 외국의 많은 무술인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외국 무술인들은 택견의 무술성과 함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다. 전통 무예가 진화해 훌륭한 예술로 승화된 것에 대한 놀라움이다. 그래서 택견을 단순한 무술로만 여기지 않는다 게 정경화의 설명이다.


“한국적인 느낌, 한국적인 리듬, 그리고 한국적인 무술은 택견밖에 없습니다. 외국인들은 택견 속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느끼고 있습니다.”
택견에 매료돼 한국의 충주를 찾아 택견을 배우는 외국인들도 많아졌고, 택견을 배워 자기 나라에 전수관을 연 외국인들도 있다. 무술을 배우는 곳은 일반적으로 道場이라 한다. 그러나 택견은 전수관이라 부른다. 택견이 문화재 지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경화는 그간의 혹독한 수련을 통해 택견 속에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깃들고 있음을 체득했다. 그 혼과 얼의 요체는 ‘참’이다. 택견의 근간에 흐르는 정신은 거짓이 아닌 진실, 악이 아닌 선의 ‘참’이라는 것이다. 옳은 마음가짐과 정신에서 선한 무예가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택견 수련의 중요한 한 부분인 정신수양의 핵심이다. “기술 수련보다 마음 수련이 더 중요한 부분이고 더 어렵지요. 택견에 조상들의 얼과 혼이 깃들어있는 것인 만큼 그만한 정신을 갖고 수련에 임해야 우리 택견의 ‘참’ 정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택견의 전승도 같은 맥락이지요.”


중요무형문화재로 택견 기능보유자인 정경화는 후계 전승자도 준비해야 한다. 보유자로서의 필수사항이다. 그의 슬하에 택견을 수련하는 아들도 있다. 그러나 후계 전승자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있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전승자의 수련기간이나 실력 등에 미치지 못하면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후계 전승자가 되려면 전수생으로 5년 이상, 그리고 전수생 평가교육 3년 등 10년 이상의 무예를 쌓아야 한다. 나이도 고려의 대상이다. 40대 초반의 나이가 적격이다. 현재 ‘택견전수관’에는 정경화 아래로 조교가 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경화가 꼽고 있는 후계 전승자는 이 모든 자격을 갖췄다. 현재 정경화 밑에서 전수관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신종근 사범이 바로 그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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