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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강조했던 스승, 학문의 화두가 되다
‘현재’를 강조했던 스승, 학문의 화두가 되다
  • 이석규 한양대·사학과
  • 승인 2014.02.10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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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간행한『정창렬 저작집』

지난달 25일 한양대에서 姑정창렬 한양대 명예교수(사학과) 1주기를 맞아『정창렬 저작집』간행 출판기념회가 개최됐다. 정창렬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권위자이자 진보적 민중사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출판기념회를 기획한 이석규 한양대 교수(사학과)가 이번 출판기념회의 의미를 짚었다.

한양대 사학과 교수이셨던 정창렬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이 됐습니다. 평소 글쓰기에 무척 신중하셨고, 드러내기도 꺼려하셨던 선생님은 생전에 아무런 저서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이 가려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셨습니다. 140여 건에 이르는 여러 형태의 글들은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 흩어져있어 구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해 보기가 쉽지 않으면 잊히기도 쉽습니다. 천박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양극화, 왜곡된 민주주의, 남북의 대립 등 극복해야 할 과제가 여전한 현실의 한국사회에서 선생님이 평생 화두로 삼았던 문제의식이 잊혀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정창렬 저작집』을 간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흔히 선생님에 대해 민중사학자 혹은 갑오농민전쟁 연구자라고 평가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선생님의 전체를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 분의 한국사 연구의 바탕에는 항상 현실의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이 깔려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인식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발전 전망을 밝게 하는 것인가.” 이 고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선생님의 연구 성과는 제대로 평가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갑오농민전쟁과 실학

마르크 블로흐는 “어떤 학자가 자신을 둘러싼 인간, 사물 혹은 사건을 관찰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쓸모 있는 골동품 애호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는 있겠지만 역사가라는 이름은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역사가의 관심은 언제나 ‘현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선생님은 ‘역사가’였습니다.

선생님의 한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4·19 민중 항쟁을 계기로 형성됐습니다. 강고해 보이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의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추구한 이념적 토대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착목한 것이 갑오농민전쟁과 실학이었습니다. 이 두 주제는 한국의 전통 사회가 제국주의와 맞닥트렸던 격변의 시기에 한국 민중은 격변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자기 성장을 이루어냈는가를 밝히는 매개고리였던 셈입니다.

먼저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선생님은 봉건적·민족적 모순이 중첩된 당시의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으로서의 자기 형성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문제로 확대됐습니다. 그 결과 한국 근대사의 전개 과정을‘근대화’과정이아닌,‘ 근대민족’으로서의결집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한국 근대사를 근대화의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식민지 시대의 민족 모순은 실종되고 아울러 근대화의 주체 또한 애매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식민지근대화론’의 등장을 일찍부터 예견하고 우려한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 근대사를 근대 민족으로서의 결집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한국 근대사의 주체는 온전히 한국주민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후자의 시각에서 갑오농민전쟁을 실증적으로 천착했습니다. 오랜 연구의 결과, 갑오농민전쟁은 반봉건·반자본·반식민지화를 지향하는 농민운동이었음을 밝혔습니다.

이 같은 결론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는, 비록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 단계에서 농민들은 근대 민족주의의 이념을 형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선생님의 마지막 연구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근대’를 극복하는 계기를 한국사의 내적 전개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실학에 대한 선생님의 연구는, 마찬가지로 한국 근대사를 근대 민족으로서의 결집과정으로 파악하는 시각에서 그 이념적 토대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전통적 세계관이었던 ‘華夷’은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으로 ‘朝鮮中華主義’로 전화됐는데, 이는 조선에 대해서는 비록 ‘漢族’은 아니지만 예와 도덕이 행해지는 ‘華’로 규정하면서도 청에 대해서는 종족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바뀔 수 없는 ‘夷’라 규정하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국 중심주의 또는 타자화의 논리는 실학 단계에서 ‘華夷一也’의 인식을 통해 극복됐다고 합니다. 즉 실학의 화이론은 국가 또는 민족 간의 관계를‘차별’이 아닌‘차이’로 인식했고, 문화의 다원성을 인정했으며, 국가안보와 민생안정을 제일의적 가치로 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변화는 역사인식에도 영향을 미쳐, 인간 특히 ‘民’의 주체적 ‘營爲’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는 사관을 성립시켰다고 합니다. 생애 마지막 논문에서 선생님은 실학의 이러한 특징을 근거로 그것이 근대 민족주의의 맹아였다고 결론짓습니다.

한국 사회의 극복과제와 스승의 확신

후대의 평가를 기다려야겠지만, 현 단계에서 선생님의 한국사 인식에 나타나는 일관된 특징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한국사가 한국의 주민집단에 의해 주체적으로 전개됐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항상 현재 한국사회의 극복 과제와 연결돼 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선생님의 역사 인식은, 간행사에서 경희대 김태영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듯이, 군사정권 시절과 민주화 운동 시절을 지내면서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만들었습니다. 한 차례의 영어 생활과 두 차례의 해직을 겪으면서도 선생님의 확신과 문제의식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정창렬 저작집』의 출간을 계기로 이제는 후학들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석규 한양대·사학과

이석규 한양대·사학과한양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조선 전기 三年喪制의 확립과 民의 성장」, 공저서로『民에서 民族으로』등이 있으며 현재 조선시대사학회 이사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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