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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잔한 더치페이를 위해
쪼잔한 더치페이를 위해
  • 조삼섭 숙명여대·홍보광고학
  • 승인 2013.12.18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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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전에 미국에서 경험했던 장면이다. 동료 교수들과 커피집에 갔는데, 커피 한잔에 기억으로 2불 정도했던 거 같다. 나를 포함 4명이 갔는데 각자 주문하고, 계산을 하는데 모두 따로 (separate)라고 하면서 각자 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줬다. 4명의 커피가격을 합하면 세금포함 아마 10불 정도했을 거 같은데, 우리 같으면 분명 한사람이 계산했을 것인데, 상상하기 힘든 장면을 목격해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식 해석을 가한다면 쫀쫀하기 그지없는 미국 개인주의 문화의 단면이다. 서구의 개인주의가 한국의 情도 없고 무미건조 하다는 부정적 의미이리라.


서구의 개인주의가 과연 그런 정 없는 문화이기만 할까? ‘우리’라는 의식 속에 숨은 집단성, 획일성, 타인지향성의 체면문화는 미덕이기만 한 건가? 밥값 내기가 부담되는데 연장자가 밥값을 계산해야 하는 문화 속에서 연장자는 계산하고 내서 후회했을 수도 있다. 겉으로는 결코 후회하는 모습을 결코 보여서는 안 되는 체면문화보다 무미건조한 더치페이가 뒷끝이 더 개운할 수 있는 거 아닌지. ‘우리’라는 집단무의식이 농경사회에서는 분명 생존을 위한 미덕이었고, 여전히 상부상조의 덕목이 필요함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이 잠재의식적인 ‘우리성’ 이라는 동전 이면에 숨은 폐해가 디지털 시대에 작동하고 있으니 집단적 ‘우리’는 이제 이기주의 아닌 개인주의로 변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유교적인 체면문화가 특히 강한 우리사회에서 타인의 평가,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행동양식이나, 삶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친다. 땅이 좁고 인구밀도 높은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유럽식의 소형차보다는 중형차가 더 많고, 유채색 색상보다는 무채색 계열이 다수를 이루고 있음은 체면문화, 집단주의 문화의 전형적 예다. 돈을 들여서라도 좋은 곳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하고, 체면에 이 정도 집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누군가 정해놓은 문법들 속에 집단주의의 힘은 작동한다. 왜 경차 타고 다니는 사장님은 보기 힘든가? 작은집에 사는 부자는 왜 없는가? 왜 우린 이래야 한다는 문법의 힘이 너무 강한 위세에 눌려 사는가? 다양성 대신에 튄다고 규정하는 그 무서운 문화적 사회적 문법의 힘은 왜 안 바뀌는가? ‘우리’의식의 힘은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의식은 정치에서 여전히 강력한 변수이고, 동문회가 아직도 중요한 사회이고, 모교출신이 여전히 어느 대학이든 주류고, 어느 조직이든 여전히 성골 진골의 하위문화는 쉽게 만들어진다. ‘우리’의식은 끈적끈적한 내집단을 만들어내고 끌어주고 밀어주는 그 소중한 미덕(?)을 자랑하지만 그 은밀한 배타성은 결국 타인의 소외를 낳고, 능력 있고 참신한 이들의 진입을 방해한다. 내밀한 ‘우리’를 공유한 사람에게는 나를 쉽게 드러내지만, ‘우리’를 공유하지 않은 타자에게는 경계심을 드러내고, 불온의 안경을 쓰고 심지어는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튀지 말아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둥글 둥글하게 살아라’, ‘무색무취로 살라’는 어느새 내면화된 우리의 생존 처세술이기도 하다. 학연, 혈연, 지연이 ‘우리’ 라는 의식을 더욱 공고하게 하고, 비공식적 네트워킹을 만들어가고, 이 사적인 문법은 공적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창조는 기존의 문법파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지금은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최소한 밥은 먹고 살고 있고, 수돗물의 찬물 대신 더운물로 머리감을 수 있는 환경인데 삶의 현장 곳곳에 아직도 강한 힘을 발휘하는 집단주의 체면문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타자 지향적 문화가 강한 체면주의 풍토에서는 창의적 발상, 진정한 개인주의는 어렵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라는 말로 오해가 일어나는 우리사회에서는 자각과 성찰자로서의 개인주의가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 개인 취향과 개성보다는 평균치에 머물러야 안전하다는 이 소시민적 안전희구 취향 대신에 이제 튀는 개성이 미래를 먹여 살리겠다는 창조경제의 근본적 기반이 아닐까?

애니팡 게임 열풍이 한동안 불더니 어느 사이 사그라져 버렸고 가까운 집 옆 산에 가더라도 완벽한 등산화와 등산복을 입고 등장하는 우리네 풍경은 아웃도어 시장 열풍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한국사회의 편리함을 내세운 아파트 문화는 그중에서도 몰개성 획일화 문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편리함 대신에 많은 것을 대신에 비용으로 지불한 것이 개인주의, 개성의 몰락이다. 고가 제품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이 안전하고 좋은 것이라는 마케팅 전략이 어느 사회보다 잘 통하는 사회이다. ‘우리’성이라는 근대의 문법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아이디어, 가치, 취향, 제품, 사람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밥값 내기를 더치페이로 하자고 하면 벌써 ‘쪼잔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일을 걱정하지만 난 혼자 누군가 계산을 하는 것이 영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이 동네이웃의 개념을 앗아간 아파트에서 벗어나 이웃을 가진 단독에서 살아보고자 하는 꿈도 꿔본다.

□ 다음호 추천 릴레이 에세이의 필자는 이종민 전북대 교수입니다.


조삼섭 숙명여대·홍보광고학
필자는 미국 플로리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한국 PR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홍보, PR관련 다수 국내외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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