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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命을 봤던 꿈의 기록 … 그것은 어떻게 일본에 넘어갔을까?
天命을 봤던 꿈의 기록 … 그것은 어떻게 일본에 넘어갔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11.26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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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지음 | 산처럼 | 416쪽 | 22,000원


어느 탁월한 문학비평가가 이것을 가리켜 ‘황홀경의 세계’라고 일찍이 말한 바 있었다. 현실 같으나 결코 현실이 아닌 꿈속의 풍경, 결코 王座를 꿈꿀 수 없었던 안평대군 李瑢의 혼이 담긴 이 작품. 그러나 이 작품은 불행하게도 우리 곁에 있지 않다.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외교관으로 도쿄, 뉴욕, 파리, 뉴델리, 브뤼셀, 튀니스에서 근무했으며,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과 주 튀니지 대사를 역임했던 김경임 중원대 교수가 작심하고 이 작품 「몽유도원도」를 호출했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다.


제목 자체가 흥미롭다. ‘~을 찾아서’는 소설가들이 단골로 사용하는 ‘탐사형’ 제목으로, 지적 긴장감과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修辭다. 김 교수는 「몽유도원도」를 가리켜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한다. 이 서화는 찬란했던 세종 시대의 문화 예술을 상징하는 작품이지만,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그래서 우리 마음에 뜨거운 회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회상을 덧붙인다. “오래전부터 「몽유도원도」에 매료돼 이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준비해왔다. 그러던 중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이 서화가 전시됐을 때,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들에게 30초가 허용됐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느꼈던 비애와 분노는 필자만의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 ‘뜨거운 회한의 감정’을 한갓 감정에 내맡겨두지 않고, 작품의 탄생, 의미, 일본으로 유입된 사정 등을 조목조목 따져나갔다. 「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넘어가 덴리(天理) 대학에 소장된 경위와 과정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곧 추적을 중단해야 했다. 자료 부족과 함께 저자 스스로 「몽유도원도」 에 관해 잘 모르면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왜 그의 꿈을 그림과 글로써 남기려고 했는가?’, ‘왜 이 서화에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했는가?’ 저자의 질문은 본질적인 곳을 향해 나아갔다. 이 근원적 이유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저자가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만난 것은 안평대군의 생애와 꿈의 해석, 찬문의 이해였다. “과연 꿈과 예술, 정치와 역사가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 이 서화는 단순히 風流韻事의 결과로 태어난 그림과 시문이 아니었다. 절실한 메시지와 분명한 스토리를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수성이라는 대업에 참여한 왕자가 자신의 天命을 보았던 한 편의 꿈을 기록한 그림과 문서였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안평대군의 활동 지평을 조명하면서 계유정난으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는 과정까지 현미경 들여다보듯 자세히 읽어내고, 이후 「몽유도원도」가 사라졌다가 일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위를 따지는 방식이다. 저자의 접근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짚어본다면, 「몽유도원도」를 당대의 현실 정치와 관련해서 읽어낸 부분이다. 단순히 정치사적 해석이 아니라, 안평대군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내면과 사상을 엿보는 심리분석적 해석을 진행했다.


「몽유도원도」는 동양적 이상향 무릉도원을 꿈에 본 안평대군이 그 생생한 기억을 되살려 재현한 ‘황홀경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황홀경의 세계’는 현실 정치의 지평을 살아야 했던 안평대군에겐 다른 의미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분수와 도리의 세계에 대한 표상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나 던진다. 저자는 이렇게 읽어낸다. “분수와 도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산수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시비를 분별해 물러날 때의 분수를 아는 것이지만 또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는 것으로 진퇴의 올바른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선비의 길이며, 바로 세종으로부터 匪懈堂 당호를 받았을 때 ‘명철보신’해 오직 임금 한 사람만을 받들라’는 세종의 교훈이기도 했다.”


「몽유도원도」가 선비의 분수와 도리를 담았다고 한다면, 거기엔 어째서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걸까. 저자는 그것이 ‘통속적인 도원도’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그림 속의 ‘도원’을 가리켜 “그가 앞으로 가야 할 목적지이며, 반드시 도달해야 할 종착지였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비어 있는 곳’이어야 했다. “언젠가 그가 그곳을 찾아서 진실로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는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인적인 끊긴 쓸쓸한 도원의 모습은 안평대군의 방문을 기다리는 듯 보인다.” 이 대목은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 안평대군과 안견이라는 걸출한 거인들이 빚어낸 이 작품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지적이기도 하다.


이미 역사가 보여줬듯, 안평대군 이용의 생애는 불운했다. 어쩌면 그는 꿈속에서만 완전한 자유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골육상쟁의 비극적 최후를 맞으면서 「몽유도원도」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50년 후 임진왜란 때 이 작품은 약탈당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300여 년의 세월동안 비장돼 오다가 메이지 유신의 정세 속에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얽히면서 소유자가 바뀌던 끝에 현재의 소장처인 덴리대학에 정착하게 된다.


「몽유도원도」가 덴리대학에 소장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流轉에 관여했던 이들은 세상을 떠났다. 「몽유도원도」가 걸어온 길을 증언해줄 증인은 저자의 말대로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덴리대학의 스즈키 오사무(鈴木治) 교수가 대학 도서관보에 2번에 걸쳐 소장 경위를 소개한 글만 있을 뿐이다. 저자의 미덕이 돋보이는 대목은 바로 이곳이다. 저자는 스즈키 오사무의 기록에서 몇 가지 오류와 모호한 점(소유주의 이름 표기 오류)을 발견한 것이다. 일본측 기록을 점검해서 오류를 바로잡아 사실에 근접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책의 탄생을 자극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몽유도원도」의 소장자 변경과 관련, 人名 이름에 오류가 있는데도 국내 미술사학자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류를 되풀이한 관행적 접근을 교정해야겠다는 학문적 관심도 책의 탄생을 거들었다.


저자가 책의 ‘에필로그’에 남긴 구절 하나가 두고두고 여운을 남긴다. “「몽유도원도」가 태어난 이 땅에서 진정으로 안평대군을 추모하고 「몽유도원도」를 기릴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우리가 정말로 「몽유도원도」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자문해보면, 飮水思源이라는 교훈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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