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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든 것을 돌파해 시대를 앞서 나갔다” … 왜곡된 모습 뒤의 진면목
“그들은 모든 것을 돌파해 시대를 앞서 나갔다” … 왜곡된 모습 뒤의 진면목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10.07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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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_ 현대 건축을 바꾼 두 거장

▲ 천장환 컬럼비아대 교수
경희대 건축학과에 적을 둔 천장환 교수(41세·사진)는 비교적 젊다. 컬럼비아대에서 건축학 석사를 한 뒤, 졸업하고 5년간 뉴욕과 보스턴에서 실무를 익혔다. 2009년 가을부터 네브래스카주립대에서 3년간 조교수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설계사무실(officer ReduX)을 설립해 다수의 건축 공모전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2012년 9월부터 경희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현대 건축을 바꾼 두 거장』(시공아트 刊)을 내놨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잘 알려진 ‘현대 건축을 바꾼’ 거장이다. 천 교수는 라이트를 가리켜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추구’했다고 평가했으며, 미스는 ‘현대 도시의 풍경’을 만든 이라고 읽어냈다. 라이트와 미스에 관한 언급은 많았다. 이 책이 조금 색다른 것은 그런 ‘두 거장’을 불러내고 기억해낸 ‘방식’에서 온다. 저자가 9년 동안 연구하고 모은 자료들을 집대성했다는 것. 일반인들이 건축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전문용어의 사용을 최소화했으며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는 것. 저자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찍었거나 주요 아카이브에서 구입한 사진들, 라이트와 미스가 직접 그렸거나 그 원본을 참조해 저자가 다시 그린 도면과 스케치 등 500점의 귀한 도판들을 담았다는 것 등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두 건축가의 삶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그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분명한 대조를 이뤘기에 둘을 비교해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다 저자의 특별한 호기심, 즉 르 코르뷔지에와 달리 라이트와 미스의 삶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판단도 덧붙여졌다. 천 교수의 평가는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70년이 넘는 라이트의 경력 중 극히 일부만을 알고 있고, 미스는 ‘모더니즘의 황량함과 적막함을 초래한 인물’이라는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완전히 생소하거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시기부터 자신의 믿음과 의지로 모든 것을 돌파해서 시대를 앞서 나갔던 선구자들이었다.”
라이트와 미스, 두 선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건축가가 부동산 개발업자의 하청인으로 전락한’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 젊은 건축학 교수는 라이트와 미스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라이트,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추구하다
건축가로 활동하던 70년 동안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하면서 기존 건축계에 신성한 충격을 주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삶은 마치 시소를 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초기의 10년간은 주택 건축가로 인정받았지만, 그 뒤의 20여년 동안은 한물간 인물로 취급받다가 말년에 화려하게 부활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그칠 줄 모르는 실험 정신을 통해 일상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예술작품이 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주는 건축을 실현해 냈다. 무엇보다도 그의 건축은 주변의 자연과 건물의 내외 공간을 상호 침투시킴으로써 공간 안의 인간을 자연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라이트의 건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라 할 수 있다. ‘주변의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축’이란 뜻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레리 양식의 전형인 로비 하우스(Robie House)와, 미국건축가협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건축’으로 선정한 낙수장(Fallingwater)이다.


로비 하우스는 유럽 양식을 모방하지 않고 미국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미국만의 독특한 스타일, 즉 프레리 양식을 추구한 작품이다. 19세기 말의 미국에서는 주택에 유럽식으로 포치(porch, 지붕이 있는 현관)를 달았는데, 집주인은 이 공간에서 행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라이트는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포치에서 담소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에 과감하게 포치를 없애고 거리에서 출입구가 잘 안 보이도록 집 방향을 돌렸다. 또한, 라이트는 두꺼운 벽들로 막혀 있던 내부 공간을 모두 뚫고 방들을 대각선 위에 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면서 공간을 발견하도록 했다. 이렇게 박스 형태를 해체해 널찍한 대지와 호응시킨 것이 프레리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다.

▲ 라이트의 대표작 「낙수장」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건축인 낙수장은 라이트가 설립한 탤리에신 펠로십에 참가했던 한 실습생의 아버지가 의뢰한 것이다. 의뢰인은 베어 런이라는 폭포 옆에 별장을 지어 달라고 했지만 라이트는 폭포가 쏟아지는 바위 위에다가 낙수장을 세웠다. 낙수장은 ‘대지에서 자라 나온 건축’을 지향한 유기적인 건축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정수다. 3시간 만에 설계를 끝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 건물은, 그러나 라이트가 설계 당시에 바닥의 철근 보강에 부주의한 탓에 완공 직후부터 보수공사가 계속돼야만 했다.


말년의 역작이자 많은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은 완공까지 16년이나 걸린 프로젝트다. 초기의 의뢰인이었던 솔론 구겐하임이 죽고 담당자마저 바뀌면서 설계안의 내용이 몇 차례나 뒤집혔지만, 계단을 대신한 나선형 램프(ramp)만은 계속 살아남았다. 이 나선형 램프 덕분에 내부는 유기적이고 명상적인 공간이 됐고, 관람자의 동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가서 완만한 곡선의 램프를 따라 내려오도록 구성돼 피로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의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이상적인 전시 공간이라 생각했던 ‘화이트 큐브(white cube)’에서 완전히 벗어나 경사진 벽을 가진 구겐하임 미술관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이후에 이 미술관은 많은 예술가와 관람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현대 도시의 풍경을 창조한 미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독일과 미국에서 살았던 미스 반 데어 로에(Miss van der Rohe)는 이 시기에 서구를 휩쓸었던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학장으로, 미국에서는 일리노이공과대의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모더니즘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그는 많은 추종자와 비판자를 낳았다. 말년에 많은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현대 도시를 삭막한 고층 빌딩으로 채우는 데 앞장선 주범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스 건축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판박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복제했다는 실망감을 넘어서야만 만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라 따뜻하고 아름다운 재료를 차갑고 깔끔한 구조와 완벽하게 조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디테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었다. 역동적으로 흐르는 공간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이뤄진 건축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기 위한 그칠 줄 모르는 노력이 미스의 위대한 건축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미스는 1920년대부터 공간과 기능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나중에 자신의 건축에서 중심 주제로 삼은 ‘무한정 공간(universal space, 거대한 하나의 빈 공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그는 건물의 기능과 공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동료 건축가들과 논쟁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공간을 충분히 크게 만드세요. 당신은 정말로 그 공간이 어떻게 사용될지 확신하나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지, 우린 알 수 없어요.” 바르셀로나 파빌리온(Barcelona Pavilion), 빌라 투켄타크(Villa Tugendhat), 일리노이공과대의 크라운 홀(S.R.Crown Hall)은 이러한 생각을 실제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많은 추종자와 반대자를 만들어 냈던 미스의 건축을 가장 잘 상징하는 건물은 아마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일 것이다. 이 건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리와 철로 된 고층 빌딩의 전형으로, 미스의 후예들이 20세기 중반의 대도시에 마구잡이로 세운 건물들의 모델이 됐다.

▲ 미스의 역작인 「시그램 빌딩」

그러나 시그램 빌딩은 무수한 복제품들이 따라올 수 없는 면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디테일의 완벽함과 미학적 측면이다. 미스는 당시 법규가 허용하는 많은 면적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27미터나 뒤로 물러난 곳에 건물을 위치시켰는데, 그 결과 건물 앞에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 조성됐다. 이 광장은 빽빽한 고층 건물들이 들어찬 도심에서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한다(한국에도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삼은 빌딩이 있다. 청계2가 사거리에 있는 삼일빌딩이다).


미스의 말년의 대표작은 베를린 신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으로, 실현되지 못한 바카디 사옥과 셰퍼미술관을 거치면서 디테일의 완성도와 개념의 명료성을 갖추게 된 작품이다. 관절염이 도졌던 미스는 병원에서도 도면을 검토할 정도로 이 작품에 애정을 쏟았는데, 이는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를린으로 금의환향해 그곳에 위대한 미술관을 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은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전시물이 됐다. 포디움은 예술품을 지지하는 전시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유리로만 둘러싸인 내부는 안과 밖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한다. 지붕을 떠받치는 십자 모양의 철골 기둥 8개는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데, 이런 섬세한 디테일들이 모여 이 건물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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