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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해전’과 오페라의 ‘유령’ 사이
제물포 ‘해전’과 오페라의 ‘유령’ 사이
  • 교수신문
  • 승인 2013.08.2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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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탐정문학의 독자들에게는 이미 고전으로 통하는 『오페라의 유령』, 『노란방의 비밀』의 작가 가스통 루르(Gaston Louis Alfred Leroux, 1868~1927)는 『제물포의 영웅들』이라는 역사 르포(reportage)를 남기고 있다. 이 책은 국내에서 2006년에 출간됐는데,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발굴’의 의미가 큰 출간으로 평가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 독자들이 갖고 있는 한 작가의 전형적 인상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프랑스의 추리소설 작가가 한국과 주변 제국들의 역사의 한 주요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는 이색적인 정황만으로도 신선한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리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의 유령』과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의 ‘제물포 해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문에 대해 가스통 루르가 기자이자 작가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평이한 답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는 기자로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을 인터뷰 하면서 살았고, 말년에는 주로 추리 소설 작업에 몰두해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그가 르포에서 문학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과학의 시대라고 할 19세기 말부터 ‘문학’과 ‘르포’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기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 문학의 서사에 과학주의적이며, 객관주의적인 장치들이 도입됐던 것이다.

특히 추리문학은 비현실적 상황을 다루면서도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비롯해 우리가 잘 아는 고전적 탐정들은 이런 시대의 제스처를 육화하고 있다. 수많은 익명 혹은 실명의 증인들의 인터뷰, 편지, 신문기사 등에 대한 인용은 르루의 소설과 르포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이는 객관주의적 추리소설의 기법의 일부이자 객관성의 정언명령을 따르는 역사적 르포의 빠질 수 없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역사적 기억은 그러한 것들로 재구성되고, 추리소설에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어떤 비밀스러운 사건과 범죄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물포 해전에 대한 기록 역시 프랑스, 영국 함대 등에 분선해서 귀환하는 러시아 생존 장병들과의 인터뷰로 구성돼 있다. 가스통 르루는 재직하고 있던 신문사의 위탁을 받아서 이들이 귀환하는 배에 올라 5일간 인터뷰 한다. 그리고 위기의 상황에서 러시아 함대와 함께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 함대들의 교신내용들을 사료로 첨부한다.

특히 러시아 해군장병들의 생생한 증언들은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포의 포신에 걸린 내장들, 갑판 위에 흘러다니는 뇌수들, 피 뭍은 돛과 잘려나간 팔다리가 굴러다니는 선체. 추리소설 작가답게 혹은 저널리스트답게 르루는 포격전 당시 상황과 군함의 실내외 공간구조와 무기성능과 갑판의 재질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폭력과 전쟁의 위험에 상당히 민감한 性癖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오페라의 유령』이 사회내적인 범죄를 대상으로 한다면, 『제물포의 영웅들』은 국제적인 폭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제 2 제정기 파리의 도시 재구조화 사업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장대한 오페라 하우스는 그 자체로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미로와 같은 도시를 오페라 하우스의 홀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같은 형식으로 설계됐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유령’에서는 2톤 짜리 샹델리아가 객석으로 떨어져 손님을 죽이고, 2천 프랑이 마법봉투에 든 것처럼 위조지폐로 바뀌는가 하면, 유명 오페라 여가수가 공연 중에 실종된다. 다른 한편 침묵하는 한반도를 사이에 둔 ‘해전’에서는 차르와 조국을 위해 제물포 앞바다에 러시아 國歌를 울리며 열세인 전력에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제물포의 영웅들은 용감하게 나아간다. 그리고는 황색 난쟁이들의 선전포고 없는 비겁한 공격에 장렬하게 산화한다.

‘유령’과 ‘해전’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무대를 달리하면서도 한결같이 상당히 ‘유령적인’ 혹은 ‘신화적인’ 뉘앙스로 들린다. 지극히 합리적인 시대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비합리적 사실처럼 『오페라의 유령』 서두에서 작가 루르의 말대로 “유령은 정말 살아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근대 제국들과 도시들에 출몰하던 유령은 어떤 레퀴엠의 후렴구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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