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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그 깊은 상흔의 땅 … 어긋난 영혼의 共鳴 공간으로 거듭나야
민간인 학살 그 깊은 상흔의 땅 … 어긋난 영혼의 共鳴 공간으로 거듭나야
  • 교수신문
  • 승인 2013.07.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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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7_ 거창

▲ 거창은 한국 근현대사의 또다른 아픔이 얼룩진 공간이다. 양민학살이라는 비극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거창 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이 세워져 있다. 사진출처=http://tour.geochang.go.kr

2013년 3월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독립영화 「청야」의 제작발표회가 거창군청에서 있었다. 2011년 거창 양민학살사건 60주기를 계기로 준비해 오다가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되면서 (사)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가 주축이 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영화제목 「청야」는 작전명 ‘堅壁淸野’에서 유래한 말로 빨치산의 보급원을 차단하기 위해 산골마을들을 초토화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특수성 한국전쟁기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일어난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적어도 100만명을 넘으면서도 국가가 인정하는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제주 4·3사건, 노근리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으로 극히 소수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사단장 최덕신이 지휘하는 국군 제11사단 9연대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총 7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른 민간인 학살 사건과 달리 가해자들이 곧 그 지역을 떴고, 그해 3월 29일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사건이 폭로돼 어느 정도 진상이 규명되고, 관련자에 대한 처벌도 이뤄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건조사 당시 국군에 의해 진상 규명이 저지됐고, 이승만 정권기에 처벌된 관련자가 정부의 주요 요직에 다시 기용되는 등 적절한 처벌이 행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학살이 일어난 거창군 신원면은 해발 고도 700~900m에 달하는 산들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 고립된 지리산 자락의 한 농촌마을이었다. 피학살 유족들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19혁명을 통해 새로이 진상 규명의 빛을 보는 듯하다가, 1961년 5·16쿠데타로 혁명재판에 소환되는 등 좌경세력으로 몰렸다. 그 후로 줄곧 불온세력으로 낙인찍히다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한 탈냉전과 민주화의 시대를 맞아 민간인 학살에 이목이 모이면서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재조명된다. 그 결과로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지고, 이에 의해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2004년 준공됐다. 피학살자와 피학살 유족들이 불온세력으로 50년간이나 시달려온 후의 일이다.

불편한 공존 지역, 거창
당시 거창에 있었다고 해서 모두가 학살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경찰 관련 가족, 지역 유지들은 학살을 모면했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면장이었던 박영보는 1960년 4·19 이후인 5월 11일 유족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됐다. 면장에 대한 원한 보복이었으며 범죄자를 잡지 않으면 또 보복할 것이라는 유족들의 생각에서였다. 주거지를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의 근 50년 간에 걸친 내부갈등을 쉬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 내부갈등만 있었을까.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나고 이틀 후, 즉 같은 시기, 같은 부대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이 또 있다. 산청·함양 양민학살이 그것인데, 이 사건은 초기에 문제가 제기되지 못한 탓에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았으며, 1990년도에야 겨우 유족회를 구성해 탄원서를 낼 정도였다. 거창에 인접한 지역으로 산청·함양에서 일어난 양민학살 사건은 1990년대 이후 조명받기 시작한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같은 양민학살 차원에서 넉넉히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산청·함양 지역의 유족들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5만평이나 되는 넓은 부지로 2004년 준공된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찾아오는 이 드문 황량한 벌판과 같이 서 있는데, 그것은 그 이름 그대로 ‘거창’만을 학살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50년에 걸친 억울한 세월로 거창이 거창 자신만을 거두기에도 바빴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거창이 아닌 여타 지역을 아우르는 공간으로 자신을 규정했다면, 거창은 한반도 전역의 제2, 제3의 거창의 모태로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창추모공원: ‘追’되는 영혼의 공간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추모공간과 역사교육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추모공간은 위패 봉안각과 참배단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참배단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아 있는 위령탑, 위령탑의 좌우로는 무릎을 꿇어 용서를 비는 군인들과 구천을 떠돌아다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각각 상징하는 참회와 환희라는 군상, 사건 발생 전의 거창군 신원면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묘사돼 있는 부조벽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이는 하늘로 인도하는 天羑門과 天羑橋를 지나 이르게 된다. 역사교육관의 내부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빨치산倒 토벌작전, 반공교육을 설파한 글이 전시돼 있다. 추모공간과 역사교육관을 종합하면, 추모공원은 죽은 자를 반공정신에 입각한 평화정신을 가진 양민으로 생각하며, 군인들은 참회했으니 환희하며 승천하기를 그 넋을 위로하며 기원하는 장으로 해석된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갖는 위령의 기능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 단절을 도모한다. 죽은 자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 저 세상으로 아무쪼록 잘 떠나길 바란다. 죽은 자의 불만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켜 만족시키는 것 등은 포함돼 있지 않다. 즉 죽은 자와 산자 사이의 접합으로 죽은 자의 無念, 遺志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는 추모공원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 영원히 깊은 잠에 들길 바랄 뿐으로, 결국 추모공원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상호작용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지 못해, 죽은 자가 생전에 지닌 문제를 파악해 해결하는 행위를 촉구하는 연결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서 우리는 단지 너무나 덧없는 죽음이었기에 한 맺힌 죽은 자의 죽음과 산 자의 억울한 삶만을 가늠하고 공감해야 하는가. 죽은 자와 산 자가 상호 共鳴하는 수행성을 이끄는 장으로 이 공간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리의 숙제로 남겨져 있다 할 것이다.


박수경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일본어학
필자는 일본 다쿠쇼쿠(拓殖)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 「나가사키 하시마(군함섬)를 둘러싼 로컬 기억의 생산과 정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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