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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北에서 부친 따라 避亂 내려온 1.5세대 … 그를 잃고 가슴에 줄 하나 끊어지다
平北에서 부친 따라 避亂 내려온 1.5세대 … 그를 잃고 가슴에 줄 하나 끊어지다
  • 교수신문
  • 승인 2013.07.1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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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굳세어라 국제시장』과 ‘김영삼’

김영삼, 하면 전직 대통령부터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는 전직 대통령이 아닌 국제시장 장사치 김영삼 씨를 지칭한다. 그는 국제시장을 터전으로 삼아 유년기를 보내고 늘그막한 지금까지 국제시장 골목에서 장사를 하는 중이다. 그렇고 그런 양반을 내가 전직 대통령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국제시장 1세대 상인들의 최후진술을 묶은 르포집 『굳세어라 국제시장』(2011)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 피란민 1세대 상인들의 삶
흔히 말한다, 국제시장의 사람들이 입을 닫으면 부산 전체가 적막강산으로 변한다고. 그 정도로 시장 규모가 어마어마한 곳이 바로 국제시장이다. 게다가 이곳 일대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애환까지 배어 있다. 부산포 개항 후 왜관시절부터 왜인들의 거주지로, 해방이 된 후에는 귀환동포들의 임시거처로, 한국전쟁 때에는 피란민들의 궁핍을 해결한 삶의 터전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귀환동포 및 피란 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북내기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은 곧 민중구술사적인 측면에서 귀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이런 가치에 대해 눈여겨보지 않았다. ‘문화게릴라’로 불리는 이윤택 연극연출가는 남달랐다. 생뚱맞게 부산에 오자마자 도요출판사를 차리더니 도요상상총서를 기획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출판사 기획위원이라는 직함을 얻어 발을 담그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랬는데, 뜬금없이 선생의 입에서 국제시장 피란민 1세대 상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자는 기획안이 불쑥 나오는 게 아닌가. 군침이 돌긴 했지만 작업의 지난함 때문에 얼른 엉덩이를 뺐다.

한데 <부산일보> 문화부에서 좋은 기획안이라며 연재까지 제의하고 나서는 바람에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취재를 나선 때는 연일 ‘물폭탄’을 퍼붓는 장마철이었다. 먼저 국제시장의 모태인 부평시장부터 훑기로 했다. 부평시장은 일제시대에 한일공동시장이 그 기원이다. 그러니까 재래시장이 아닌 인위적으로 설립된 시장인 셈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피란민들이 몰려와 은밀하게 나도는 통조림과 같은 군수품과 밀수품까지 숨겨놓고 장사를 하면서 깡통시장까지 생겨났으니 그곳에 찾아가서 머리가 허연 노인이나 적산가옥 같은 건물만 물색하면 되리라 싶었다. 하지만 골목을 훑다시피 해도 1세대 상인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성과 없이 비지땀만 흘린 꼴이었다. 땀도 식힐 겸 팥빙수 한 그릇이라도 먹으며 다리쉼을 할까 싶어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중노인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뭐 찾으슈? 별 생각 없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중인데요? 하고 말았다. 사람? 어떤 사람 말이우? 그는 이래봬도 자신이 통장 출신이라며 나를 재우쳤다. 그 바람에 나는 저간 사정을 풀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실눈을 찌그러뜨리고 듣기만 하던 양반이, 좋은 일 하시는구먼 하더니 제 무릎을 쳤다. 알고 보니, 그는 평북 박천에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피란 온 후 인근 보수동에 살고 있는 피란민 1.5세대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의 말투 때문이었다. “이북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 하며 놀림을 당하는 바람에 고쳤다며 껄껄거렸다. “우리 아버지 별명이 깡통시장의 ‘보초’였어요. 미제 초콜릿, 과자, 담배 등을 허리에 두르고 골목 맨 앞에서 장사를 한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죠. 미군 MP(헌병)의 단속이 뜨면 아버지가 골목으로 신호를 보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골목 안으로 도망을 쳤죠.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이곳을 놀이터삼아 놀다가 아버지 심부름을 시키면 집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아버지가 손님이 찾는 물건을 없으면 심부름을 시키곤 했거든요. 그때야 뭐 어린 마음에 용돈 버는 기회니 얼씨구나 하고 달려갔죠. 우리 아버진 장사 수완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분이었어요. 만주를 오가며 아편장사까지 했다고 했으니 피란 오기 전부터 장사엔 이골이 나 있던 위인이었죠.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어떤 때는 ‘산타’처럼 돈이 가득 든 가마니를 둘러메고 귀가할 때도 있었다니까요? 장사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불법이 더 수입이 짭짤하단 거. 아마 그때 수입이었다면 부산시를 통째로 사도 샀을 겁니다. 근데 워낙 술에 노름으로 죄다 말아먹어버렸어요. 어머니의 고집이 아니었으면 요 코딱지만 한 가게도 안 남았을 겁니다.”

팔팔한 60대 중반에 운명 달리한 ‘꾼’
그는 자신의 가족사뿐만 아니라 골목의 변천사와 피란 당시의 애환들을 떠오르는 대로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인터뷰할 사람들을 소개해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피란 와서 남편의 사업 실패로 고생하다가 늘그막에 이곳 시장에서 가게를 마련한 노파와 이북내기 노인 여럿을 한꺼번에 소개해주기도 했다. 심지어 소개해준 분이 취재를 사양하면 부러 같이 동행해 취재를 도와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채록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로부터 말 붙이는 요령이며 넉살까지 익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야기를 된장처럼 구수하게 풀어놓을 줄 아는 기찬 재주를 가진 천상 ‘꾼’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런 연유로 책이 묶여 나오기 무섭게 그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한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람.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저승으로 가기엔 아직 팔팔한 60대 중반이었지 않은가. 가슴에 뭔가 줄 하나가 탱, 하고 끊기는 것 같았다.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사진작가에게 왜 그렇게 자신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했는지 그 이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는 지병을 앓고 있으면서 내게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이상섭 소설가
필자는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2002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했다. 부산소설문학상, 백신애문학상을 수상, 소설집으로는 『슬픔의 두께』 등과 르포집 『굳세어라 국제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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