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銃口의 전선, 그곳은 여전히 아픈 중심으로 남아 있다
銃口의 전선, 그곳은 여전히 아픈 중심으로 남아 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3.07.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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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5_ 판문점·휴전선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한국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유일한 분단국가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이념의 갈림으로 남북으로 분단됐고, 이어 서로 죽이고 죽는 참혹한 전쟁까지 치렀다.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다만 쉬고 있는 상태이며, 언제 재발할지 모를 군사적 충돌을 막고자 남북한 간에는 서로를 나누는 약 248km의 군사분계선, 일명 휴전선이 그어져 있다. 그 선을 중심으로 남북 2km 폭의 비무장지대를 두어 휴전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비무장지대는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돼 가고 싶어도 못가는 곳이 됐다.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의 望鄕歌가 그칠 날이 없고, 같은 민족끼리 총구를 맞대고 있는 휴전선은 한반도의 그 어느 곳보다도 아픈 곳이다. 분단이 한민족이 가진 가장 큰 아픔이라면, 휴전선과 거기에 남북으로 걸터앉은 판문점은 그러한 아픔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 이시우의 말대로 ‘아픈 곳이 중심’이라면, 판문점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장소다.

한국 현대사의 중심 장소
지금의 판문점 일대는 역사적으로는 몇 몇의 단편적인 기록만이 남겨져 있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개성부 板門平으로 『高麗史』에 기록돼 있으며, 長湍府에서 송도(개성)로 가는 길에 板門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현재의 판문점과 인접한 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들러 술 한 잔 먹곤 하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 나선 선조가 대문짝을 뜯어 만든 다리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판문점 일대가 널문리로 불린 것은 이러한 일화와 관련된 듯하다. 그 이후에도 서울과 개성을 오가던 많은 길손들이 이곳에 들러 잠시 숨을 고르곤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판문점이 소통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는 토폴로지가 확인된다. 주막과 초가집 몇 채만이 있던 한적한 길목에 불과하던 판문점이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것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적 역사와 관련해서다.

판문점은 교착상태에 있던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열린 정전회담의 역사적 현장이 되면서 비로소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됐던 것이다. 1951년 7월, 정전을 위한 예비회담이 처음으로 열린 곳은 개성의 고려동에 위치한 來鳳莊이었다. 하지만 당시 개성은 북의 관할 하에 있었고 따라서 정전협상에 걸 맞는 중립적인 장소로 새로 물색된 곳이 현재의 판문점 일원이다. 당시 회담장이 지어진 곳은 콩밭이었고 그 옆에는 ‘널문리 가게’라는 주막과 3채의 초가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회담에 참가한 중국 측이 유일한 지표식인 널문리 가게를 ‘板門店’이라는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회담 장소가 판문점으로 불리게 됐다.

 

▲ 널문리 그 허허벌판에 그어진 선 하나. 그 위에 만들어진 ‘판문점’에서 민족의 최대 비극인 전쟁을 마무리하는 회담이 진행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전’이 아닌 ‘휴전’ 협정이었다. 당시 진행된 휴전회담 사진들을 영화처럼 구성해봤다. 작은 사진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판문점은 회담이 열린 곳에서 다시 500m가량을 동쪽으로 이동해 새로 지어진 것이다. 정확하게 휴전선을 반분하는 곳에 판문점을 두기 위해서다. 판문점이 자리한 동서 800m, 남북 400m의 장방형 공간은 정전협정에 근거해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단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설정된 곳이다. 군사정전위원회는 정전협정의 실행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최고 기구로, 유엔군과 북한 및 중공군사령관이 각각 5명씩 지명한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위원회가 관할하는 이곳은 분단의 당사자인 남북한 어느 쪽의 실효적 지배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특히 한국은 정전협정 조인에 참여하지 못한 터라 군사분계선 남쪽의 판문점 지역도 공식적으로는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관할하고 있다.

이처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분단이 남북한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냉전체제의 산물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서 分斷은 국제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판문점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기간 동안 休戰이 관리되는 곳이기도 하다. 정전협정이 아직 평화조약 체결로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갈 것 같지 않던 휴전이 반세기를 훨씬 넘어 지속되면서 판문점과 휴전선은 장소와 관련된 많은 기억들을 만들어 냈다. 휴전선은 남북을 가로막는 경계다. 경계는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한 장벽의 역할을 주로 하지만 소통이 필요할 경우에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즉, 이곳은 남북한의 가장 근접한 대치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끊어진 남북을 잇는 소통의 길목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계지역이 가진 특성이다. 판문점 일원에서 발생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낸다.

‘분단’의 장소에서 치유의 장소를 향하여
돌이켜보면, 판문점에서는 정전협정 이후의 전쟁포로 교환(1953년), 푸에블로호 납치 관련 미군 송환(1968년), 도끼살해사건(1976년), 전대협대표 임수경의 귀환(1989년), 정주영회장의 소떼방북(1998년), 비전향장기수 북송(2000년),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왕래 등의 다양한 일들이 이뤄졌다. 이 가운데는 도끼살해사건과 같이 남북한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 있는가 하면, 소떼방북처럼 통일의 희망을 품게 하던 기억들도 있다. 장벽이자 통로라는 이중의 장소성으로 인해, 남북한 관계가 좋을 때에는 통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거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때에는 반공의식 강화를 위한 안보관광의 메카가 되기도 한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에 의해 장소성을 획득한 판문점과 휴전선은 그 아픔을 치유해야할 근원적인 숙제를 안고 있다.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최선의 길은 평화조약이 체결돼 분단의 상징으로서의 장소성이 폐기되고 새로운 장소성을 얻는 것이다. 판문점은 이제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을 향한 새로운 기억들을 하나씩 쌓아가야 한다. 군사분계선에 걸터앉은 판문점은 현재에도 남북한의 대화와 소통이 이뤄지는 중요한 장소다. 대화와 소통은 분단을 관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가 정전협정을 평화조약으로 바꾸며 나아가 통일로 이어진다면, 대화의 場인 판문점은 통일의 상징으로 새롭게 기억될 것이다. 소설가 이호철은 새로 쓴 『판문점』에서 분단 초기에는 그나마 가능했던 판문점 내에서의 남북 간의 자유로운 대화마저 단절된 현재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대화를 통해 화해의 기억, 소통의 기억, 희망의 기억을 쌓아나가다 보면 통일이 한층 다가오지 않을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필요 없게 되는 날, 그날이 분단의 상징이 아닌 통일의 상징으로서의 판문점이 새롭게 탄생하는 날이다.

이상봉 부산대 한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지방정치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저서로 『탈근대탈중심의 로컬리티』, 역서로 『모빌리티와 장소-글로벌화와 도시공간의 전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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