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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과학자만의 전유물일까?
그것은 과학자만의 전유물일까?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3.06.1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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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17. 과학정신

바야흐로 과학기술 전성시대다. 과학이 무기이자 식량이고, 치료제이자 미래이다. 이 가운데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서  ‘과학정신’을 고찰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철학회(회장 김혜숙 이화여대)는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1일까지 이틀간 인제대에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철학’을 주제로 60주년 기념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기조발표를 맡은 엄정식 한양대 석좌교수(언어분석철학)는 「과학기술시대의 철학과 과학정신」을 통해 “과학정신은 과학적 인문정신”이라면서 “과학정신은 과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엄 석좌교수는 과학의 영역을 과학정신, 과학지식, 실용 과학기술 세 가지로 나눴다. 그는 “과학은 상당한 부분 인문학의 영역으로 침투해오고 있다”면서 “과학정신은 합리성, 개방성, 비판성, 자율성, 보편성, 엄밀성 등으로 구성”된다고 밝혔다.

그 중 합리성이 가장 중요하다. 과학적 합리성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추론의 도출에서 그 과정은 비판적 합리성, 성과는 체계적 합리성과 연관된다. 엄 석좌교수는 비판적 합리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과학정신이야말로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됐으며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그리고 다원주의적인 문화형태의 근간”이라고 밝혔다.

과학이란 무엇일까? 과학은 철학과 비슷하다. 자연과 세계,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게 바로 과학이다. 엄 석좌교수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은 본래 이질적인 개념이다. 그는 “과학이 제공하는 정보와 지식은 새로운 세계관과 우주관과 자연관을 갖도록 유도한다”라고 말했다.

비판적 합리성의 소환

과학이면 과학이지, 왜 과학기술과 철학일까? 엄 석좌교수는 이에 대해 과학의 외연 측면에서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철학의 영역이었던 인식의 주관에 과학이 편입됨으로써 존재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관의 창조다. 둘째, 과학기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거역함으로써 인류의 운명을 가늠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예전의 풍차가 바람으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려 했다면, 현대의 풍차는 기류의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된다. 에너지라는 것이 새로운 방식으로 저장되는 건 자연의 순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과학정신은 무엇인가? 엄 석좌교수는 “과학자가 과학적 탐구에 임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자세”로 규정했다. 특히 “기본적으로 오직 실험과 관찰을 통해 얻어낸 자료를 근거로 논증이란 방식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려는 탐구의 정신”이다. 과학정신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며”, “의미의 세계에 속하는 내면적 가치들”이다. 이렇기 때문에 더더욱 과학적 탐구 방법에 한계가 있다. 과학정신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과학적 인문정신이다. 첫째, 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한다. 둘째, 과학지식을 규정한다. 셋째, 과학기술의 특성을 특징짓는다.

철학자들의 과학적 합리성 비판은 △흄의 귀납법 비판 △포퍼의 반증주의 △쿤의 과학 패러다임 △로티의 신 실용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엄 석좌교수에 따르면, 로티는 과학이란 ‘발견하기’가 아니고 ‘만들기’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계몽적 이성 vs 도구적 이성

현대에서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문제는 상상을 초월한다. 엄 석좌교수는 그 이유로 과학과 기술의 제휴를 제시했다. 왜냐하면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가 관조에서 지배 혹은 조작으로 바뀌었고, 과학과 기술이 연결됐기 때문이다. 이해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분석은 수많은 포스트모더니스티들이 이미 제기한 바 있다.

현대과학이 야기한 문제를 풀기에는 기존의 철학 혹은 패러다임은 변화한 시대적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철학의 자기반성이 요구된다. 여러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과학주의(논리실증주의자들, 영미 과학철학자들)와 반과학주의(후설, 하이데거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비판이론가들)가 있다. 예를 들어, 하버마스는 기술공학 속에 숨어 있는 국가기능의 확대와 통제에 따른 과학주의의 폐해를 간파하고 기술 관료의 지배 위험을 비판한다. ‘계몽적’ 이성이 기술의 진보를 이룩했으나 ‘도구적’ 이성으로 나아가면서 인간은 생산조직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 과학정신과 철학,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에 대한 그의 고찰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과학이 불러온 재앙을 설명하기에는 단편적이다. 즉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분석만으로 갈음하기에는 현대과학의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원자력 마피아’ 사건에서 보듯이, 현대과학의 문제는 과학과 기술의 제휴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적이고 문화적이다. 과학정신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다원주의를 불러온 것이라면, 과학정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 석좌교수는 반과학주의의 근간이 결국 과학적 합리성의 본질, 즉 비판적 합리성을 소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학정신이 과연 전지전능한 것인가. 과학정신이 여러 속성을 지니고, 그 중 비판적 합리성이 철학에 귀속되는 것이라면, 과연 과학정신의 실체는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아야 한다. 과학정신이 과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철학적 가치라면 과연 과학이라는 게 존재하고, 과학정신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과학은 없고, 기술만 남는 것은 아닌가.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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