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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어떻게 영광에만 후하고, 나주에는 박하십니까?
조정은 어떻게 영광에만 후하고, 나주에는 박하십니까?
  • 김경옥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승인 2013.06.10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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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32 조선시대 목장 통폐합 갈등

이 글은 서남해역 목장 운영에 얽힌 백성들의 하소연이다. 우리나라에서 말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몽고 침략 때의 일이다. 고려 말에 몽고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을 바라보고 흡사 자기네 나라의 풍토와 닮은꼴로 인식했다.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은 우리나라에서 양마를 길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시범 지역을 선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나라의 목마는 조선 초기 중국에 말을 수출하는 나라로 급부상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친환경적(?)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모양이다. 과연 목마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조선정부는 말을 수출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조선시대에 말을 기르기 위해 설치됐던 목장과 목마를 길러내기 위해 동원됐던 목자(牧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남 신안군 압해면 대천리 일대에는 '똘장' 또는 '짱돌'이라 부르던 돌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장에서 기르는 목마가 주민들의 가옥과 텃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설치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목마는 나라의 부강을 측정하는 단위였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목장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전국을 조사했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 중에 전라도가 겨울철에 크게 춥지 않고, 말이 풀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호평을 받았다고 기술돼있다. 특히 물과 풀이 풍부한 바다 속의 섬과 연안지역의 곶이 말을 방목하기에 최적지로 선정됐다. 예컨대 전라도 함평의 해제곶(현 무안군 해제면)과 나주의 압해도(현 신안군)가 이에 해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목장터로 지목된 땅이 본디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이미 주민들이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예컨대 진도의 부지산 일대는 말 300필을 방목할 수 있는데, 주민 70여 호가 거주하고 있었고, 해남의 황원곶은 말 4천 필을 놓을 수 있는데, 거주민 400여 호가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에 중앙정부는 서남해역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을 내륙으로 집단 이주시키고, 그 곳에 목장을 설치했다. 조선 세종~성종 대 서남해역에 설치된 목장은 34개소였다.  

조선후기에 이르자, 서남해역의 목장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7년 전쟁이라 부르는 임진~정유재란을 겪는 동안 우마적(牛馬籍)이 없어지고, 목마가 소실되면서 비어 있는 목장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전달해 주는 문건이 인조 13년(1635)에 사복시정 장유(張維)의 보고에서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전국 각도의 목마장 총 119개소 가운데 목마를 기르고 있는 곳은 겨우 46개소에 불과하다’라고 보고했다. 폐목장이 그만큼 많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서남해역의 목장을 개간하자는 논의가 중앙정부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병조판서 김석주가 ‘나주의 임치도 목장에 주민들을 들여보내서 개간하자’라고 건의한데서 비롯됐다. 이 때 숙종은 병조판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임치도 목장 개간을 승인해주었다. 황무지로 방치돼 있던 목장을 개간해 경작지로 사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7세기 섬 주민들은 중앙정부의 승인 하에 본격적으로 목장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목장이 경작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섬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갈등을 빚었으니, 목장 통폐합에 따른 주민들의 찬반양론이 그것이다. 정조 15년(1791)에 나주의 압해도 목장과 영광의 임자도 목장의 통폐합 건에 대한 단자가 중앙정부에 접수됐다. 이에 정조는 섬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처리하도록 전라감사에게 명했다.

그림은 ‘공마봉진’(『탐라순력도』)은 1702년 6월 7일 제주 목사가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해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 때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가 영광군수와 나주목사의 문건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즉 “영광에서 이르기를, ‘임자도 목마장의 둘레가 30여 리나 돼 모든 곡식을 심을 만하고, 산 밑의 평평한 곳을 ‘종달평’이라 부르는데, 둘레가 4리쯤 돼 이곳에 토지를 만들면 수백 결이 될 것이라 합니다. 금일 만약 목마 105필을 압해도로 옮기고 목장을 개간한다면 백성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목장을 옮기고 농사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합니다. 반면 나주에서는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게 하고 각기 소속 관청에 분급한 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 설치한 것인데, 이제 와서 이곳의 목마를 옮겨 저곳으로 합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옥토에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경우나, 말 떼가 농사에 해를 끼치는 것은 피차가 마찬가지입니다. 목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섬사람들의 고락이 달려있는데, 이제 또 하나의 목장을 첨가한다면 실로 압해도 백성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비록 임자도가 개간지로 적합한 땅이라고는 하지만, 그 목마를 압해도 목장으로 옮기면 압해도 백성들의 새로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압해도 주민 모두가 목마를 원치 않으니 도신(道臣)은 편리함과 불편함을 생각해, 반드시 뜻을 분명히 해야 할 것 입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영광에만 후하게 하고, 나주에는 박하게 하십니까? 라고 항의했다.”

즉 영광의 임자도 주민들은 목장을 혁파하고 개간하는 일에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었고, 나주 압해도 주민들은 추가로 목마를 인수해야할 입장이어서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조선정부는 임자도와 압해도 주민들의 찬반론에 부딪쳐 더 이상 목장 통폐합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본래대로 각자 목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후대의 실록 기사를 검토해 보면, 나주 압해도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광 임자도 목장이 개간된 것으로 확인된다. 오늘날 임자면사무소에서 대광해수욕장 방면으로 향하다보면, 왼쪽으로 장방형의 농경지가 조성돼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앞서 언급한 ‘종달평’이라 부르는 개간지이다.

반면에 나주의 압해도 목장은 최근 압해도와 목포시가 연도교가 건설되면서 섬이 아닌 섬이 됐지만, 실제 일제강점기까지 압해도에는 남곶목장, 서곶목장, 북곶목장이라 부르는 3개의 목장이 남아있었다. 또 압해면 대천리 일대에는 ‘똘-장’ 혹은 ‘짱-똘’이라 부르는 돌담의 흔적이 남아있다. 즉 서곶목장에서 기르는 목마가 대천리 주민들의 가옥과 텃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설치한 돌담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백성들의 거주공간보다 목장터가 더 커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정부는 내륙 인근에 입지한 목장은 보존한 반면, 먼 바다에 위치한 목장은 개간해 경작지로 이용하도록 했다. 바로 양마 수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김경옥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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