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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회과학·의학계 모여 걸음마 뗀 ‘임종학’연구가 지향하는 것은?
철학·사회과학·의학계 모여 걸음마 뗀 ‘임종학’연구가 지향하는 것은?
  • 이승환 고려대·중국철학
  • 승인 2013.05.21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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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_ ‘죽음의 질’향상을 위한 철학적 싸나톨로지

요즘에는 “오래 사세요!”라는 말 대신 “건강하세요!”가 더 환영받는 인사말이 됐다. 하늘이 준 생명을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무의미하게 생명이 연장되는 일은 환자 자신을 위해서나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나 그다지 바람직한 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과연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생명 유지 장치를 통해 목숨을 연장시키는 일은 바람직한 것일까?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환자에게는 어떠한 사전준비와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품위있는 죽음을 위해 제도적 차원에서는 어떤 장치와 실천이 필요한 것일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4일 고려대 국제 원격회의실에서「‘죽음의 질’ 향상을 위한 철학적 싸나톨로지(thanatology)」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는 바로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고려대 철학연구소와 한국 싸나톨로지협회 공동주관으로 개최된 이 학회에서는 필자와 천선영 경북대 교수(사회학과), 윤영호 서울대 교수(의대), 손명세 연세대 교수(의대), 최일봉 카톨릭대 교수(의대) 등이 발표자로 참여해, 「죽음(death)과 죽음맞이(dying)」, 「죽음의 사회학적 의미」,「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사회정책의 방향」,「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사전 의료의향서 작성」, 「환자중심의 의료윤리」등의 문제에 관해 열띤 담론을 펼쳤다. 화창한 주말 오후였음에도 2백여 청중이 운집한 것은 이 주제가 참석자 본인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주변 가족을 위해서도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 쪽 발표자로 필자는「죽음과 임종」에서 사물의 죽음과 사람의 죽음이 구분돼야 하는 이유를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제시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지만, 사람의 죽음은 사물의 죽음과 구별돼야 한다. 사물의 죽음은 생물학적 소멸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죽음은 이를 넘어서서‘의미추구 활동’의 완결을 의미한다. 사람은 비록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떠날 때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연명치료의 대상이 돼 의식도 없이 병상에서 지내다가, 산소호흡기의 제거와 더불어 맞이하게 되는 수동적 죽음은 ‘품위 있는 죽음’이라기보다 ‘사물의 죽음’에 불과하다. 준비된 죽음, 능동적 죽음맞이는 환자 자신과 남는 사람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 잘 맞이하기(well-dying)’는 ‘잘 살기(well-being)’의 일부라고 필자는 강조했다. 사회학계 발제자로 나선 천선영 교수는 한 개인의 죽음이 ‘의미 공동체’ 안에서 지니는사회학적 의의에 대한 조명을 통해, 사람의 죽음은 사물의 죽음과 구별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의학계의 발제자로 나선 손명세 연세대 교수는 2009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김옥경 할머니 사건’을 예로 들어, 회복불가능한 단계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은 오히려 환자의 존엄성을 보호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손 교수는 ‘사전의료의향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처할 경우에 대비해, 자신이 받을 치료의 범위와 한계를 미리 설정함으로써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서약문서이다. 미국은 1994년에 존엄사 법을 만들어 사전의료의향서가 법적으로 표준화됐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아직 개인적인 의사표명에 불과할 뿐 법적인 효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신체에 대한‘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환자자신의 인격적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 된다. 이런 사전대비는 환자자신과 주변사람을 위해서 고통과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유용한 문서가 된다. 손 교수는 발표의 마지막에 청중들에게도 사전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두도록 당부하면서, 서식을 내려 받을 수 있는 인터넷사이트(www.salimo.net)를 소개했다.

그간 아쉽게도 ‘죽음’에 관한 논의는 우리사회에서 터부시돼 왔다. 죽음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금기시하는 일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죽음에 관한 담론의 부재는 환자로 하여금 ‘준비된 죽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환자를 ‘품위 없는 죽음(death without dignity)’으로 내모는 요인이 된다. ‘임종학(thanatology)’은 의미추구적 존재인 사람이 품위 있게 ‘자기 완결’을 이룰 수 있도록 안내하고 보조하는 통섭학문이다. 질병치료 및 통증완화와 관련된 자연과학, 인간됨의 의미와 자기완성을 다루는 인문과학,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다루는 사회과학, 이 세 분야가 통섭적으로 협동해‘개별생명’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인륜성의 성숙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이 학문이 지향하는 최종목표이다.

한국에서 ‘임종학’은 이제 갓 시작하는 학문이다. 고령인구가 갈수록 증가하는 현 추세에서 ‘죽음 잘 맞이하기(well-dying)’는 ‘잘 삶(well-being)’ 못지않게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죽음에 다가서는 일이 생명활동의 한 부분이듯이, ‘죽음 잘 맞이하기’는 결국‘잘 삶’의 일부이다.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하는 일은 죽는 사람 자신이 자아존중감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남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임종학의 성숙과 발전을 통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의미 없는 ‘사물로서의 죽음’대신 의미추구적 존재로서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승환 고려대·중국철학
하와이대에서 박사를 했다. 고려대 철학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성리학의 기호 배치방식과 조선유학의 분기」 등 141편의 논문과, 『횡설과 수설: 400년을 이어온 성리논쟁에 대한 언어분석적 해명』외 37권의 저역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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