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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자를 매료시킨 ‘오페라의 왕’의 진면목
서양사학자를 매료시킨 ‘오페라의 왕’의 진면목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5.20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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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 전수연 지음│책세상│330쪽│20,000원

‘오페라의 왕’이라는 수식이 늘 붙어다니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아이다」 등 세계 오페라 극장을 지탱하는 오페라 넘버들을 작곡한 이탈리아의 대표 음악가. 바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1901.1.27)다. 올해는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연구년을 맞아 프랑스에 나가 있는 전수연 연세대 교수(사학과)가 이 특별한 오페라의 거인을 조명해 화제다.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책세상 刊)를 내놨기 때문. 잘 알려져 있듯 베르디에 푹 빠져 있는 이들은 오늘의 현대인들만이 아니다. 당대의 이탈리아인들은 베르디를 잘 이해했고, 덕분에 그는 ‘신화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도니체티, 로시니 등 선배들을 능가하며 이탈리아의 상징이 된 그의 성공에는 상대적으로 늦게 국민국가 만들기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정치적·문화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민족주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대,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합을 염원한 이탈리아인들에게 「나부코」(1842), 「에르나니」(1844), 「레냐노 전투」(1849) 등 애국적 오페라로 민족의식을 고취한 베르디는 ‘비탄에 빠진 민족의 옹호자’였으며, 그의 작품은 환호와 열광의 대상이었다. 바로 여기에 서양사학자와 오페라 작곡가가 만날 수 있는 ‘화이트홀’이 있다.

“음악은 사로잡히는 것”(단테)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19세기 프랑스사’를 전공한 전수연 교수는 열렬한 베르디언임을 자처한다. 저자에게 이 책은 베르디의 200회 생일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베르디에 관한 책을 낸 데는 두 가지가 배경을 이룬다. 하나는 베르디와 프랑스의 관계. 또 하나는 전 교수의 개인적 체험이다. 사실 베르디는 프랑스와 인연이 깊은 작곡가다. 나폴레옹 황제 통치하의 파르마에서 태어났으며(그래서 그의 출생증명서에는 ‘프랑스인’으로 기록돼 있다), 위고나 뒤마 피스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원작을 토대로 한 대표 작품들을 썼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번째 요인이 이 책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날 친구가 보내준 ‘연극 초대권’이 저자의 지적 관심사에 변화를 가져온다. “덕분에 그녀의 어머니가 연출한 빅토르 위고의 연극 「에르나니」를 보며 희곡이 오페라로 변신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됐다. 베르디의 오페라로 먼저 접했던 「에르나니」의 오리지널인 위고의 「에르나니」는 오페라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를 계기로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던’ 그의 오페라 관람은 ‘분석의 장’으로 넘어오게 된다. 음악을 사회적·역사적 산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의 태도는 전형적인 역사학자의 그것이다.

음악 전공자도 아닌, 더구나 이탈리아사 전공자도 아닌 사람이 베르디에 관한 책을 쓴 데 대한 주위 반응을 염려하면서도 저자는 “음악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히는 것”이라는 단테의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사로잡혔다’라고 말한 대목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베르디의 노래, 그의 멜로디는 귓가에서, 혀끝에서 맴도는 경향이 있다. 아마 그는 이른바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작곡가들 중 엘리트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일 거다.

잘난 음악학자나 애호가들은 그래서 그를 이류로 취급하기도 한다.” 베르디의 주특기를 ‘사극의 탈을 쓴 시사물’로 파악한 저자는 “역사는 또한 각양각색의 이탈리아인들에게 집단기억을 만들어주는 접착제였다. 베르디와 그의 작품은 그러므로 이중적으로 역사적이다.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역사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평가한다. 베르디에 대한 저자의 애정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베르디 신화’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역사적 평가도 빠지지 않았다. 리소르지멘토(부흥, 통일운동) 오페라의 대표격인 「나부코」에 붙인 물음표가 대표적이다. 「나부코」는 베르디가 만든 4막의 오페라다. 성경의 이야기와 오귀스트 아니세 부르주아와 프란시스 코르누의 연극 「나부코도노소르」와 안토니오 코르세티의 발레 「나부코도노소르」가 원작이며 테미스토클레 솔레라가 이탈리아어 대본을 완성했으며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라 스카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리소르지멘토 오페라의 상징으로서 기념비적 입지에 등극하는 「나부코」가 롬바르디아의 예속 상태를 상징하는 존재 그 자체인 부왕의 딸에게 헌정되다니, 우리의 리소르지멘토 영웅은 일그러진 영웅인가? 그는 출세지향적 기회주의자였을까?”

 

이 오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곡은 히브리의 합창인 ‘가라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sull'ali dorate)’다. 신인 베르디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으며, “1842년 한 해 동안 밀라노에 판매된 「나부코」 티켓 수가 밀라노 총인구를 능가했을 정도”였던 이 오페라의 성공 요인을 두고 이 역사학자는 ‘애국심’이란 쉬운 답을 보류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사실 이 작품은 베르디가 라이너 대공의 딸 아델라이데 대공녀에게 헌정한 것이었다. 그의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리소르지멘토 오페라의 상징으로서 기념비적 입지에 등극하는 「나부코」가 롬바르디아의 예속 상태를 상징하는 존재 그 자체인 부왕의 딸에게 헌정되다니, 우리의 리소르지멘토 영웅은 일그러진 영웅인가? 그는 출세지향적 기회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나부코」를 만들 당시 베르디는 이 작품의 폭발력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거꾸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보험’을 든 것일까?” 전 교수의 세심한 시선은 이렇게 이어진다. “파리의 연극과 밀라노의 발레 모두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의존을 기본 테마로 하고 있으나, 솔레라의 펜을 거치면서 상반되는 두 민족적 종교적 집단의 대립과 갈등으로 탈바꿈했다.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솔레라가 만들어낸 장면으로 연극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발레에도 이에 해당할 만한 장면은 없다.”

애국심 혹은 음악적 성격
그렇다면 ‘애국심’ 말고 다른 성공 요인이 있었던 것일까. 저자는 「나부코」의 성공 요인으로 ‘베르디 음악의 성격’을 강조했다. 폴 로빈슨, 테오필 고티에 등의 지적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베르디 음악이 ‘거칠고 선동적’이라고 해석한다. 그의 출신과도 관련있다는 지적이다. “시골 주막집 주인 아들인 그는 땅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가 접한 첫 음악은 농민들의 여흥이었고, 떠돌이 행상인들이나 거리 악대의 연주였다.” “고전주의의 엄격한 법칙이나 ‘좋은 취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기에 거칠면서도 강렬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것이 벨칸토의 기교 중심 음악에 다소 식상해 있던 청중의 감각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리라.” 한 가지 의문.

베르디가 죽은 뒤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천하가 된다. 바그너가 히틀러에게 음악을 통해 정치적 영감을 줬다면, 베르디는 과연 무솔리니에게 어떠했을까. 저자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흥미롭게 짚어냈다. 베르디가 유언처럼 남긴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를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읽어냈다. 이 작품을 통해 베르디는 “사후 파시스트에 독점된 바그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베르디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긴 팔스타프의 입을 통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은 그저 “농담일 뿐이야!”라고 외친다. 명예 운운하는 부하들에게 “명예가 배 채워주냐?”고 응수하기도 한다.

고백과 패러디로 일관한 「팔스타프」는 히틀러가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장인가수」를 관람하고 느꼈을 정치적 흥분과 미학적 감동을 무솔리니에게서 빼앗아버렸다. 마지막 작품으로 파시스트의 혐의에서 영리하게 빠져나간 베르디의 한 수가 놀랍다. 베르디는 개정판을 포함 모두 34편의 오페라를 세상에 내놓았다. 음악을 통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베르디가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뇌일혈로 쓰러진 것은 1901년 1월 27일이었다. 향년 87세. 이 거장의 죽음을 슬퍼해 장례식에 모인 인파만도 20만이 넘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19세기와 함께 했고 세기의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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