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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의 격언은 황혼의 강물 위에 빛나고 ‘생사일념’ 생각은 천리를 달리는데…
은자의 격언은 황혼의 강물 위에 빛나고 ‘생사일념’ 생각은 천리를 달리는데…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3.04.29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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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 36_ 취리히로 가는 길

 

루체른 리기산 정상에서 출발해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찍은 사진이다. 공중에서 본 루체른 모습. 푸른 루체른 호수가 보인다. 사진=최재목
루체른의 풍경이 눈에 익을 무렵, 나는 취리히로 떠난다. 정들자 이별이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이 내 심사’(「청춘고백」)니. 꽃도 한철. 한창 무르익었을 때, 얼른 차를 갈아타고 자리를 뜨자, 落花처럼.

루체른을 떠나기 전, 나는 바람 없는 오전을 틈타, 리기산 정상을 오른다. 숙달된 전문가 앞쪽에 캥거루처럼 안겨서라도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해볼 작정이다. ‘혹시나 떨어지면 죽는 걸까?’ 두려움도 잠시. 산록을 오르며, 노란 꽃 천지에 푹 빠진다. 나를 안내해 줄 그 사내는 건장한 체격에, 참 멋지다. 그리스의 아테네 출신으로, 20세 때부터 나이 50이 될 때까지, 30여 년간 패러글라이딩에만 미쳐 살아왔다나. 이것으로 밥 벌어 먹고 살아왔다니, 부모들 속도 엄청 썩혔겠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전에 '쫄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직접 스케치한 것이다. 그림=최재목
드디어 리기산 정상. 푸른 루체른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고, 나는 하늘을 날 순서를 기다리며 낙하할 지점을 스윽 쳐다본다. 그런데, 나는 그만 형편없이 쫄고만다. 한 짐의 패러글라이더를 가벼이 지고 올라와, 손수 장착하고, 과감히 산 아래로 몸을 던지는 여성 패러글라이딩 애호가들 뒤편에서. 초라하게 움츠리고 있는 나. 그녀들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며, 지상으로 내려갈 때, 나는 그만 혼비백산한다. 생사의 일념을 내려놓지 못하고 긴장하는데, 나의 목숨을 책임진 아테네 출신 그 사내는 겁을 주려고, 이리저리 기우뚱댄다. 나는 고래고래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는데, 더욱 신이 났는지 그는 허공 속에서 점점 기교를 부리며 나를 공포 속으로 더 몰아붙인다.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틈틈, 그는 연신 웃어대며 긴 막대 끝에 매단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는 여유까지 보인다. 치즈! 하며 포즈를 취해보란다. 역시, 꾼들은 다르다.

금세 시간이 지나고, 풀밭에 발이 닿을 즈음,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든지, 먼저 내려간 딸아이의 한 마디. 얼굴을 못 든다. “아빠, 온 하늘이 시끄러워 죽을 뻔했다!” 무서운 생각에서 소리 지를 때는 풍경에서 생각이 멀어졌고, 풍경을 감상할 즈음엔 말을 잊었던 십 여 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있을 때 그것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할 때 관찰하지 않는다’(비트겐슈타인)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을 방해한다. 또 그 반대도 그렇다’(폴 발레리)는 말들이 사실이구나!  ‘무언가를 제대로 생각(知覺)하고 있을 때는 지껄이지 않고, 지껄여 대고 있을 때는 제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구나!(知者不言, 言者不知)’(노자)

리기산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 준비 모습. 사진=최재목
반걸음 사이에도 ‘잡념’이 끼어든다는데.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 쫄고 있는 마음(生死一念)일 때 두 마음을 내지 못하고 집중하리라. 이 대목에 이르자, ‘활의 명인 빌헬름 텔’ 이야기도 나에게는 예사롭지 않다. 거기, 우리 천원권 지폐 속의 투호(投壺)가 은유하는, ‘집중’의 정신, ‘敬’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가? 성리학에서는 敬을 ‘主一無適’이라 했다.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돼 다른 데 여러 갈래로 흩어져지지 않는 것’. ‘동시에 두 가지 세 가지 마음을 내지 않는 것’.

바로 저 ‘시계바늘의 정신’과 같은 것 아닌가. 한 번에 여러 곳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시계임을 포기한 것이다. 오로지 한곳에 ‘的中’해야, 시계다. 스위스에 있는 ‘활의 명인 빌헬름 텔’이나 ‘정밀 시계’의 근저는 ‘투호=敬’의 정신과 일맥상통. 알프스 산의 절벽을 오르내리는 열차와 케이블카가 모두 큰 벽걸이 시계바늘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두 곳을 동시에 가리키지 못한다. 생사의 일념으로 살아 움직인다. 탈선하면 죽음이고, 끝이다.

짐 가방을 끌며 루체른역으로 이동해 가는데, 호수 가 길 위에, 어미거위는 새끼들을 데리고 길을 지나다 우리가 해칠까봐 사정없이 달려든다. 혼쭐이 나 도망가다 생각노니, 아! 생사를 걸고 덤비는 저 戰士 같은, 본능적으로 새끼들의 생사와 하나가 된 마음. 바로 ‘여래의 몸은 몸 아닌 것을 몸으로 삼고, 여래의 마음은 마음 아닌 것을 마음으로 삼는다(如來之身, 非身是身, 無識是識)’는 광경의 한복판 아닌가. 그래, 허망하지만 참 아름답다.

어느새, 기차는 취리히에 도착. 취리히호에서 시작되는 리마트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스위스 최대의 도시. 맑은 물에 홀려 한참을 쳐다보는데, 아, 그런데 왜 자꾸 이런 것만 눈에 띌까. 강바닥에 몸을 눕혀 홀로 허우적대며 아파하는 고기 한 마리. 인간들의 황혼도 결국 저런 것일까. 삶의 몸부림 뒤로 밀려났던 죽음은, 태양이 사라진 뒤 고개를 쳐드는 밤하늘의 별처럼, 어김없이 존재를 드러내는데. 그리고 죽은 뒤에야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 수 있다 했지. ‘蓋棺事始定’. 나의 사후는 어떻게 기억될까. 열차 속에서 스케치한, 리기산 정상에서 쫄던 내 모습을 한 번 더 쳐다본다.

취리히에 오니 위인 페스탈로치(1746~1827)가 돋보인다.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가난한 아이들, 고아들을 교육하는데 헌신했다.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묘비명과 ‘인간은 옥좌에 앉아 있으나 초가의 그늘에 누워있으나 본바탕으로는 평등하다’는『은자의 황혼』모두의 말이 隱者의 격언으로, 황혼의 강물 위에, 은은히 빛난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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