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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성·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사유
식민주의성·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사유
  • 교수신문
  • 승인 2013.04.0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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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월터 D. 미뇰로 지음|이성훈 옮김|에코리브르|453쪽|35,000원

이 책의 저자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른바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 그래서 별 볼일 없다고 생각되는 나라의 학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 있을까.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현저히 낮은 국가다. 지금도 이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그러니 그런 나라 출신이 생산해놓은 지식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번역돼 나올 만큼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는 발칙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약력을 보면 조금 안심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미국의 대학 교수로 있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고자하는 ‘글로벌디자인’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적인 사유와 지식의 현실이자 한계이다.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식민성의 한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 철저하게 미화되고 위장되기도 하면서 우리의 온몸에 이미 구분하기 힘든 상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혼혈의 역사와 문화처럼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의 본질이었으며 그 밖의 어떤 것들이 우리가 배척해야할 대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충분히 혼혈화된 우리의 상황은 그런 면에서 라틴아메리카와 그렇게 크게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지리적·시간적으로 우리가 ‘여행하는 이론’ 속에서 종속된 지식을 무차별적으로 흡입해왔는가를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무엇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의 근원을 이루는 바탕이라고 본다면, 이 명제에서 그 ‘무엇’은 항상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그리고 현재도 그것을 쥐고 있는 서구세계가 생산해낸 ‘글로벌디자인’ 속에 존재한다는 고민을 하게 된다. 저자는 또한 그것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속에서 ‘문화전이’라는 과정을 거쳐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는 악순환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행하는 이론’과 종속된 지식의 흡입
저자는 이러한 식민주의성은 1)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지구인구의 분류와 재분류를 하고, 2) 그러한 분류를 언명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맡는 제도적 구조(국가기구, 대학, 교회 등등)를 만들며, 3) 이 목표에 적합한 공간들을 확정하고, 4)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킨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이다. 결국 이러한 디자인과 메커니즘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적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사유까지도 디자인하여 지배한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마치 인문학적인 음모론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한 개인의 생각과 그러한 생각에 기초를 둔 행동이 중심세계의 헤게모니가 디자인한 사유를 통해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 저자 미뇰로가 내놓은 위로의 말이 이 책의 원제에 나오는 ‘경계사유’라는 개념이다. 헤게모니를 부정하거나 혹은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경계의 지점을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유가 존재하고 그것이 가진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금 안심할 수 있다. ‘경계사유’가 있음으로 해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생각의 노예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철저히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 같지만은 않아 보인다. 과연 미뇰로의 ‘경계사유’가 그 자체로 그가 비판하는 디자인화된 사유에 대한 진정한 경계성에 뿌리를 둔 독자적인 사유인지 아니면 글로벌 디자인의 새로운 변화의 시도인지 필자는 구분하기 힘들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적인 약진과 탈미국화 현상 그리고 미국과 세계의 히스패닉화와 완전히 별개일 수 없어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씁쓸해진다. 할리우드 영화에 치여 살던 라틴아메리카의 영화산업이 조금씩이나마 힘을 얻어가고 그들의 독특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성공한 감독들이 미국으로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할리우드가 디자인한 새로운 구도 속에 한 부분으로 편입돼 변화된 할리우드의 한 귀퉁이를 맡는다.

결국 미뇰로의 비판을 하나의 결과물로 보았을 때 그것이 할리우드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라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영화나 사유가 헤게모니의 중심을 쟁취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독자성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본질적인 내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말하는 ‘경계사유’는 극히 주변에서도 그리고 극히 중심에서조차 역시 또 다른 층위의 중심과 경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프랑스의 철학가인 퀴세가 말한 “미국에서 발명된 ‘프랑스 이론’”은 이런 의미에서 경계와 중심의 한계와 복잡성을 시사한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통해 만들어진 중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양적인 문화가 한 때 왜곡된 형태로 글로벌디자인의 지적인 포용성과 사유의 확대라는 자양분으로 활용됐던 것을 상기해보자. 이제는 미뇰로의 사유가 마치 라틴아메리카, 제3세계 혹은 서발턴의 대표로서 조금도 그 헤게모니의 강도를 약화시키지 않은 글로벌 디자인의 훌륭한 자양분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근원적 생명력 잃은 ‘경계사유’
라틴아메리카야 그렇다 치고 우리의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비록 우리나라의 영화감독이 이제 막 할리우드에 진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문학적인 면에서는 그나마도 묘연해보이니 말이다. 이제 겨우 시작한 것이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만들기 프로젝트 정도다. 미뇰로의 책이 이렇게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까지도 번역됐다는 것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또 다른 ‘여행하는 지식’에 간신히 시선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힘겨운 노력일 수 있다.

좀 더 발칙한 생각을 해본다면 그가 끊임없이 식민지성에 비판을 가하면서도 식민지성의 가장 중심을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 교수가 아니었다면, 만일 그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다면 이 책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보면 그의 ‘경계사유’는 이미 ‘경계사유’라고 말할만한 근원적인 생명력을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쇼나조각이 유행을 하고, 프리다 깔로의 미술품이 미국의 경매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거래되고, 살사와 탱고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계적인 현상과 미뇰로의 저술이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저자의 저술과 사상을 그대로 그의 비판의 방식을 통해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 참으로 고민되는 점이다.

 


송영복 경희대·스페인어과
필자는 멕시코국립자치대에서 메소아메리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라틴아메리카 강의노트』, 『마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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