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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대신 ‘주검’만 즐비 … 새로운 윤리는 어떻게 가능할까
‘죽음’ 대신 ‘주검’만 즐비 … 새로운 윤리는 어떻게 가능할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4.01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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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 생사학연구단 학술대회_ ‘우리 사회의 죽음 문화, 그 현주소를 묻다’

한림대 생사학연구단(단장 오진탁 철학과)은 지난 29일‘우리 사회의 죽음 문화, 그 현주소를 묻는다’를 주제로 제1회 국내학술대회를 주최했다. 이제는‘죽음’과‘죽음문화’에 관한 담론이 개방적으로 소통돼야 할 시점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시작한 이번 학술대회에서 정진홍 울산대 석좌교수는 편의주의에 매몰된 현대사회의 죽음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이를 위한 해법으로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수신문>은 현대사회의 죽음문화를 새롭게 해석해낸 정진홍 교수의 발표문「죽음문화의 그늘」일부를 발췌했다.

죽음은 이제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책임 있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나의‘구조’에 의한‘민주적 협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뇌사판정여부에서 이러한 사례는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공동의 책임이라든지 구조의 책임이라든지 하는 것은 실은 책임부재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 이렇게 이뤄진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오늘의 정황에서 불가피한 규범적 당위라 할지라도, 또 그 구조와 협의가 죽어가는 자의 삶을 물으면서 그의 죽음을 고뇌한 귀결로 나타난 가장 진지한 산물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죽음에서 비롯해 자기에게 과해질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편리하게‘처리’하려는 태도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주체의 죽음책임에 대한 논의가 점증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여부에 대한 논의는 직접적으로는 치유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임종환자의 연명치료거부권(존엄사)에서부터 자살자의 스스로 죽을 권리에까지, 또 우회적으로는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고통을 중지하기 위한‘죽여 줌(안락사)’의 결정주체로부터 태아 낙태를 결정하는 모친의 경우에까지, 넓은 사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의 논의는 죽음주체의 권리를 가장 존중하는 것이면서도 죽음을 위요하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고 누구도 그의 죽음을 간섭하거나 책임지지 않으려는 편의주의적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나는 그 죽음과 무관하다’라고 하는 태도의 범람을 그려보면 이러한 편의주의가 초래할 사태가 어떤 것일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더불어 사는 삶에 스미는 재앙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편의주의에 의해서 죽음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유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임부재의 또 다른 표현

종교적인 근본주의적인 태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절하여 죽도록 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적인 설명이 가능하다해도 근원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악일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단순하게 등장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죽음의 物化현상입니다. 매장에서 화장으로의 장례문화의 전이를 권하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정책’은 죽음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측정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전 국토의 葬地化는 경제적 생산성을 감소하는 원인이라고 하는 화장 권유의 논리는 죽음의례를 오물의 생산적 처리절차와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게 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아울러 그것에 동조하는 급격한 장례문화의 변화도 결국 그것이 편리한 처리수단의 확보라는 편의주의적 발상과 공명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니냐는 반론은 유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장상례의 실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불가피성이 낳는 편의주의의 遍滿속에서 죽음 자체가 이미 죽음일 수 없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죽음’은 없습니다. 생산성이나 공공의 건강을 위해, 또는 살아있는 자의 온전한 삶을 위해, 효과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위생적으로 처리해야할 ‘주검’이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그렇게‘치워지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편의주의적인 반응은 뜻밖에도 죽음이 여러 삶의 자리에서 제각기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일 수 있다고 판단하는 데서 또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사치스러운 장례’가 사회적 신분의 과시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 된 일입니다.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의례가 아니라 산자를 위한 수단이 됐습니다. 자연히 초라한 장례는 장례 당사자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고, 빈부 간에 제각기 그와 관련한 자의식을 고양시킵니다.

공동체 해체의 통로가 된 편의주의

편의주의적 태도는 예상하지 않은 공동체 해체의 통로가 됩니다. 정치적 이념의 틀 안에서도 죽음은 권력의 유지와 당해 공동체의 통합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특정한 亡者가 영속하는 이념의 실체가 됩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망자의 죽음이 없습니다. 다만 영속하는 살아있는 망자만이 있습니다.‘ 생명이 영속하는 죽음’, 또는 살아있는 죽음을 통한 통치보다 더 편리하고 효과적인 통합수단은 없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聖化를 이루기 때문인데 죽음은 이를 위한 절대적인 수단이 됩니다. 주검시위도 다르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사라지고 그의 주검은 절규를 위한 수단으로 살아 남아있습니다. 테러도 다르지 않습니다. 테러의 현장은 테러리스트와 그로 인한 피살자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 죽은 ‘수단화한 죽음의 散在현장’입니다. 종교적 순교라는 이름의 죽음도 비록 그것이 승화된 언어로 묘사된다할지라도 이 범주 밖에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바야흐로 죽음물음은 편의를 준거로 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편의를 통해 인식되고, 편의의 자리에서 그 의미가 진술되며, 편의를 준거로 그 규범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그 나름의 도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여기에서 죽음을 인식하고 승인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편의는 새로운 죽음문화의 윤리입니다. 죽음의 유실은 오히려 그러한 태도에서 막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편의주의적 입장의 완성일지도 모릅니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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