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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운동과 남북지도자회담 추진 중심지 … 역사적 장소성을 회복하려면
반탁운동과 남북지도자회담 추진 중심지 … 역사적 장소성을 회복하려면
  • 교수신문
  • 승인 2013.03.0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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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17_ 경교장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 (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경교장은 역사의 공간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오랫동안 개인 사유지에 묶여 있던 경교장이 지난 1일 복원돼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진 윤상민 기자

서울시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 ‘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竹添莊’이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의 성을 따서 마을 이름을 ‘竹添町’으로 써온 것인데 금광업으로 부를 축적한 친일 거부 崔昌學이 자신의 집에다 그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후에 일본식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백범이 근처에 있던 다리의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저택은 일본 건설회사가 시공을 맡아서 1936년 착공해 1938년 완공한 지상 2층 지하 1층의 철근 콘크리트 골조의 슬래브 집이다. 경교장의 전체 면적은 5천267.44㎡(1천593.40평)이며 건평은 874.05㎡(264.4평)이다. 뒤편에 한옥이 따로 있었으며, 경교장 남쪽에는 한식으로 높게 지어진 정문이 있었고 동쪽으로 부출입문이 별도로 있었다.

 

▲ 해방공간기 백범 김구 선생이 이곳 경교장 이층 베란다에 서 있는 모습이다.
서울시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 ‘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竹添莊’이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의 성을 따서 마을 이름을 ‘竹添町’으로 써온 것인데 금광업으로 부를 축적한 친일 거부 崔昌學이 자신의 집에다 그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후에 일본식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백범이 근처에 있던 다리의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저택은 일본 건설회사가 시공을 맡아서 1936년 착공해 1938년 완공한 지상 2층 지하 1층의 철근 콘크리트 골조의 슬래브 집이다. 경교장의 전체 면적은 5천267.44㎡(1천593.40평)이며 건평은 874.05㎡(264.4평)이다. 뒤편에 한옥이 따로 있었으며, 경교장 남쪽에는 한식으로 높게 지어진 정문이 있었고 동쪽으로 부출입문이 별도로 있었다.

집 주변으로 울창한 나무들과 잔디밭, 연못, 다리로 꾸며진 정원이 있었으며 차고 등 부대시설도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선언 후에도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은 바로 환국하지 못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원들은 11월이 돼서야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들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해 바로 미군정의 차량으로 죽첨정으로 안내된다. 최창학이 해방이 되자 살 길을 마련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사용하라고 내놓았던 것인데 임시정부환국환영준비위원회의 김석황(金錫璜)이 이곳과 한미호텔을 미리 준비해둔 것으로 보인다.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친일 갑부의 집에 머물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친일갑부의 저택에서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경교장은 단순히 김구가 서거하기 전까지 거처했던 私邸가 아니다. 이곳은 엄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청사이자 마지막 청사였으며 김구 주석의 집무공간이었다. 백범과 그 가족, 비서진뿐 아니라 일부 국무위원들의 거처이기도 했지만, 경교장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가 8차례 개최되고 포고령이 선포됐던 공적 공간이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1진과 2진이 모두 귀국해 1945년 12월 3일 경교장에서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해방정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서로의 정치적 입장이 갈리면서 임시정부의 동지들도 하나 둘 경교장을 떠났고 임시정부의 역할은 급격히 빛을 잃으며 실질적인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나 경교장에서 대한민국의 첫 정부를 세우는 작업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로 불어 닥친 신탁통치라는 풍파 속에 나라가 찬탁과 반탁의 양진영으로 나뉘어서 대립할 때 경교장은 반탁운동과 남북정치지도자회담을 추진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46년 1월 <라이프(Life)>지에 실린 사진을 보면 반탁구호를 적은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경교장에 모인 시위대들과 2층 베란다 중앙에 선 김구를 비롯한 요인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 비록 백범의 뜻과는 달리 남한에서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으로 정국의 방향이 흘러가게 되지만 그는 단정반대라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한반도의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1948년 4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주변의 사람들은 신변안전 문제와 정치적 위험에 대한 우려로 김구의 북행에 반대했다. 연석회의를 나흘 앞둔 4월 15일 그는 마침내 북행을 결심하고 이를 발표한다. “오직 우리 통일과 독립과 활로를 찾기 위하여 피와 피를 같이 한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려고 결연 가련다”라는 백범의 말에는 당시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발표가 있자 많은 사람들이 경교장으로 몰려와서 시위를 벌이며 그의 북행에 반대했다.

 

 

4월 19일 당일에도 그의 북행을 저지하는 청년들에게 백범은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어렵게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북행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백범의 의지와 행동은 조국의 분단이라는 현실 앞에서 커다란 좌절을 겪는다. 김구에게 경교장 시절은 조국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고뇌와 갈등과 좌절의 시간이었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오후 경교장 2층에서 육군대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사건으로 경교장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소로 남게 된다. 경교장을 비워주고 한옥 별채에 살면서 혹시라도 자신의 집이 훼손될까 전전긍긍하던 최창학은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족들에게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한다. 8월말 경에 백범의 가족들은 대만대사가 유엔대표로 가면서 비워준 금화장으로 이사를 한다. 그 후 경교장은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저, 미 특수부대 주둔지,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됐다. 1968년 삼성재단에 매각돼 고려병원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강북삼성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경교장의 내부 구조가 변경됐고 백범이 서거한 집무실을 포함한 모든 공간은 병원용도로 사용됐다.

기억으로서의 의미좌표를 찾아서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여러 차례 서울시, 정부, 국회에 경교장의 매입과 완전 복원을 요청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김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경교장 보존의 문제는 무관심 속에서 방치됐고 역사적 장소로서의 흔적들은 서서히 지워져갔다. 앞마당과 정원에 신축 건물과 주차장이 들어서면서 경교장 주변의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드나드는 건물이 경교장이라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하게 됐다.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그리고 2005년에는 국가사적 465호로 지정됐지만 경교장의 2층 집무실 공간만 백범기념실로 조성됐다.

2009년 소유주가 경교장을 서울시에 무상임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양측이 건물 전체를 복원하는데 합의했다. 현재 복원공사를 마치고 임시정부와 백범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전시와 기념공간으로 개관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다. 물리적 공간만으로 장소성과 토폴로지적 의미가 생성되지 않는다. 공간이 역사적 장소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장소의 공간성에 시간성을 함축하는 기억으로서의 의미 좌표가 더해져야 한다. 역사적 공간이 사라져 버리면 그 장소성도 함께 소멸하고 만다. 역설적으로 경교장이 그나마 현재의 모습이라도 유지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친일갑부의 저택으로 지어졌으나 임시정부 청사가 됐고, 외국대사관, 재벌그룹의 병원으로 사용되면서 익명의 공간으로 변했고 지금은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어색하게 서있는 경교장의 토포모르포시스(topomorphosis)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듯하다.


류지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철학
필자는 프랑스 릴3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논문으로 「베르그손과 르페브르」, 「로컬리톨로지를 위한 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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