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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종말과 강화인간의 도래
2012년의 종말과 강화인간의 도래
  • 교수신문
  • 승인 2013.01.0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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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요란스러웠던 종말 담론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2012년을 넘어서 2013년에도 살아남을 확률은 높아 보인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여러분이 인류가 남긴 삶의 잔존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인류가 여전히 이 지구행성에 생존하고 있음을 의미하리라. 한 해 전에 일본 동북부를 끔찍한 모습으로 강타한 해일은 영화 속의 불안처럼 히말라야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마야력은 지난 21일에 종말을 고했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유동적이고 불길하긴 하지만 태양은 여전히 하늘 위에서 흐릿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종말의 징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모든 진보는 파국의 긴 그림자를 함께 끌고 온다. 다카하시 도시오는 일본 사회를 ‘호러국가’라고 명명한 바 있다.

불행히도 이제 우리나라도 급격히 그 호러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해결불가능성에 의한 내적 파괴’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하루 4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고 젊은이들의 미래는 암울해 보이며 아이들은 게임과 시험을 되풀이하면서 인간의 정서를 잃어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代案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 질서 속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만이 살아남는 요행을 바란다. 그야말로 ‘멘붕 공화국’이 아닌가. 신자유주의라는 게임의 규칙은 잔혹하다.

그것은 부를 독식하는 괴물들을 승자라 부른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신화 속의 크로노스처럼 미래를 집어삼키는 권리도 허용된다. 장기침체의 늪에서 소외되고 절망한 패자들은 좀비로서의 삶을 선택하거나 스스로 종말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에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에게 다음 날에도 여전히 태양이 떠올랐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류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하리라는 믿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도 하다.

한 소설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도덕과 질서와 교양과 친절이 정당한 세계에서 약탈과 노략질과 폭력과 쓰레기가 정당한 세계로 진입”(편혜영, 『재와 빨강』)했고, 그렇게 붕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이인화가 8년여 만에 새로 써낸 장편 『지옥설계도』가 지닌 장점은 이러한 세계에 예민하게, 그리고 놀랍도록 깊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만큼이나 새로운 서사세계를 확장하고 있으면서, 도덕적으로는 훨씬 더 타당하며 사회학적으로 더 광대한 소설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문학성에 대한 평가와는 구별돼야 한다.

게다가 나는 판타지나 SF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고 또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인지라, 이 소설에 대해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이 시대에 문학이 어떻게 반응하고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 판단된다. 작가는 그저 허구로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발견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진 자다. 그는 스스로 ‘스토리 헬퍼 시스템’이라고 명명한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빚어낸 이야기들을 통해 이 세계를 탐구하고 성찰한다. 이렇게 해서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 强化人間이며 그들이 만들어낸 심비아틱 플래닛 파티(Symbiotic Planet Party, 더불어 사는 행성 당), 즉 공생당이다. 강화인간이란 과학기술을 통해 뇌기능이 강화된 인간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과거에 인류가 구원자로 호명한 존재들인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닌자거북이나 배트맨과는 다른 존재다. 강화인간은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로 무장한 현대인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세계는 영화 「13층」이나 「인셉션」 등에 반영된 것과 같은, 더 이상 진본과 가짜가 구별되지 않는 중층적 세계다. 현실감각은 흐릿해지며 인간 존재는 훨씬 더 유령에 가까운 존재로 변해간다. 이 짧은 글에서 작가가 품은 꿈이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적절하게 한 편의 소설로 이뤄졌는가를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리라. 그것은 지금의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다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이 시대엔 희귀한 다음과 같은 열정을 보여주려 할 뿐이다. 종말에 앞서 우리가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겠는가, ‘아듀, 2012’를 외치는 바로 이 순간. “천만에, 우리의 관심은 오직 행성에 있어. 인류의 대다수가 가난해졌고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렸어. 지구 환경은 점점 악화되고 행성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지. 그런데도 이 행성의 미래에 관한 결정들은 어떤 정부보다도 많은 돈을 주무르면서 돈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인간들, 선거에 의해 뽑히지도 않는 인간들에 의해 내려지고 있네. 우리는 이 구조를 바꾸려는 거야.”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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