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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 길’ … 야위고 늙은 賢者의 시선이 머문 곳
‘인생은 나그네 길’ … 야위고 늙은 賢者의 시선이 머문 곳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3.01.0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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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ㆍ상상ㆍ인문학(30): 로테르담의 현자 에라스무스 동상 앞에서(2)

해양박물관 광장에 서 있는 동상 ‘심장이 찢겨진 남자’를 본다. 머리만 있고, 가슴을 파낸 사람. 1940년 5월 14일, 독일의 공습으로 로테르담의 중심부가 쑥대밭이 되어 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것에 조의와 비통함을 드러낸 작품이다. 그래, 아픔은 이 方寸의 ‘흉중’에서 시작된다. 찢겨진 심장의 사나이를 보니 에라스무스가 오버랩 되어, 손에 쥔 에라스무스의 초상을 한 번 더 쳐다본다.

에라스무스가 49세 되던 해(1517), 퀜틴 마시가 그린 초상화는, 야윈 모습이고, 책에 둘러싸여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 뒤러의 판화작품(1526, 58세)에는 편지지에다 누군가에게 열심히 답장을 쓰고 있다. 그런데 파란만장한 시대 탓일까. 이 초상화와 1530년(62세)경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들에서 에라스무스는 확연히 늙어 있다. 耳順 전후의 나이. 눈을 약간 아래로 내리깐, 책 위에 가벼이 손을 얹은, 짙은 색의 코트, 높은 깃의 모피 옷, 검은 베레모 차림. 모자 아래로 하얀 귀밑머리가 삐져나오고 뺨도 움푹 꺼졌다. 지그시 다문 입술 가로 번진, 病弱함 그리고 뭔가를 조소하는 듯한 표정. 우울과 고독감일까. 아니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자, 백 마리 개가 그 소리에 따라 짖는’(왕부,『잠부론』) 이런 ‘개’처럼은 살 것 같지 않은 매서운 눈매다.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푸쉬킨). 에라스무스는 좌절과 공허 속에서 자유직을 전전하며 ‘떠돌던 몸’이었다. 그는 평생을 신부로 살았지만, 수도원 밖에서, 신부복도 입지 않았고, 예배도 거부했다. 루터를 비롯한 당시의 급진파(신교)에도 기성교회의 보수파(구교)에도 서지 않았기에, 설 자리가 없었다. 어떤 권력에도 기대지 않고, 어떤 편도 들지 않은 그는 외로웠지만 당당했다. 권력은 더러우나 단칼에 그것을 베어버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타협하며 살았다. 항상 자신만을 대표했던 그는 온건하고도 합리적이었고, 네덜란드 지성들의 전통인 ‘타협과 관용’을 중시했다(박홍규,『인간시대 르네상스』참조). 그에게는 ‘모리아’(痴愚女神)의 승리라는 비유로 세상을 꼬집는 여유가 있다. 그가 택한 격언처럼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는 것을 그는 믿었다.『莊子』에서 만나는 ‘쓸모없음’(無用)을 바라보는 넉넉함 일까.

 

에라스무스 초상. 맨 왼쪽은 에라스무스가 50세 되던 해(1517년)에 퀜틴 마시가 그렸다. 마르기는 했지만 책에 둘러싸여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 중간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작품(1526년)으로 1525년 병으로 앓은 이후의 모습. 맨 오른쪽 그림은 한스 홀바인이 그린 1530년 경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에라스무스 초상화. 에라스무스는 확연히 늙어 있다. 검은 베레모 아래로 나온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뺨도 움푹 꺼졌다.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을 논할 수 있지. 당신이 너른 땅 위를 걸어간다고 해봐. 땅이 아무리 넓다 한들 당신에게 딱 필요한 건 발 딛는 부분 뿐. 나머지는 직접 필요한 부분이 아니지. 그래, 당신에게 필요 없는 땅이라 해서 발 딛는 부분 외의 땅을 모조리 다 파버린다고 생각해봐. 까마득한 절벽 위에 발 딛는 부분만 겨우 남아 있게 될 걸! 이렇게 딱 걸을 부분만 남긴다고 하면, 어찌 맘 놓고 너르고 먼 곳으로 걸어 나갈 수가 있으랴’(「外物」) 버나드 쇼가 ‘모든 변화는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했듯, 에라스무스는 현자 보다는 바보가 이성보다는 비이성적인 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간다고 믿었다.

에라스무스 대교로 발길을 옮긴다. 시민들에게 ‘스완’(白鳥)이라는 애칭으로 친숙한 다리. 로테르담을 끌어당겨 오르는 새 같은데, 건축가 벤 반 버클의 설계로 1996년에 완성됐단다. 유람선 스피도를 타고 주변을 둘러본다. 거대한 무역선들이 지날 때 손을 흔들면 어김없이 저쪽에서도 답례를 한다. 에라스무스는 말한다. ‘배가 크면 클수록 또 거기에 싣는 짐짝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다 솜씨 좋은 키잡이가 필요하다’. ‘키잡이’ 그게 바로 ‘철학의 안내’라는 것(김성훈 옮김,『에라스무스의 아동교육론』, 35쪽).

격언을 중시한 에라스무스다. 원래 文字란 문화?지식 정보를 껴안은 타임캡슐이다. 그 속엔 인간이 살아온 이력과 지혜가 들어있다. 상가 집 개(喪家狗)같이 맥락을 잃고 떠도는, 고전 속의 수많은 문자들. ‘멀어진 시간’(=永)의 ‘이력’, 이미 ‘달라진 공간’의 ‘흔적’(=遠)을 봉해놓고, 시치미를 뚝 뗀다. 옛 사람들의 수많은(十) 입을 통해 유전되는, 꼬리에 꼬리를 문 말들(=口) 아닌가. 古. ‘아! 옛날이여’가 우리네 굳은 자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길을 안내해왔다. 결국 古=옛날은 ‘보편’이란 지위를 얻고, 삶의 지침(범례)이 됐다. 옛말에 틀린 게 없다! 格言의 의의 아닌가. ‘옛 古’ 자를 ‘까닭?이유 故’ 자로 풀이하는 이유다.

‘인간의 삶은 덧없는 것. 젊은이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성인은 여러 의무들로 괴롭기 짝이 없으며, 노년은 척박하고 외롭기 그지없다. …시간이란 얼마나 값진 것인가…한번 가버린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에라스무스의 아동교육론』, 26쪽, 116쪽) 인생이 짧듯, 교훈도 간명하다. 많은 인간들이 걸었던 그 길 위에, 에라스무스도 우울하게 걷고 있었다.

‘인생은 나그네 길’- 고대 희랍에서 회자되던 이 격언에 에라스무스는 눈이 멎고, 이렇게 풀이한다. ‘이승에서의 삶은 고향을 잃은 삶, 더 나은 삶을 위한 준비 기간, 떠돌이 인생일 뿐이다.’(김남우옮김,『에라스무스 격언집』, 284쪽) 이것은 바로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란 성찰이고 ‘철학함’이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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