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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성공, HK교수 신분 안정에 달렸다
사업 성공, HK교수 신분 안정에 달렸다
  • 권형진 기자
  • 승인 2012.12.24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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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_ 교수신문·한국연구재단 공동기획: 인문학,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

 

2006년은 ‘인문학 위기’의 해였다. 2004년부터 3년 동안 12개의 철학과와 6개의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가 폐과됐다. ‘인문학 위기’란 키워드가 들어간 전국종합일간지 기사가 2005년 219건에서 2006년 401건으로 1.8배로 늘었다.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들에 이어 전국 인문대학 학장들이 ‘인문학 선언’을 발표하자 언론은 이를 인문학 ‘위기’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인문학자 집단 비명’, ‘인문학의 탄식’ 따위의 기사가 하루 평균 5건씩 쏟아졌다. <조선일보>는 ‘위기의 인문학 살 길은…’이라는 기획기사를 세 차례 내보냈고, <문화일보>는 ‘인문학의 위기’를 네 차례 이상 기획으로 다뤘다.

인문한국(HK) 지원사업은 바로 이러한 ‘인문학 위기론’의 범람 속에서 2007년 출발했다. 인문학을 진흥시키기 위한 HK사업의 방식은 이전과 달랐다. 연구자 중심의 개별지원이 아닌 연구소 지원을 택했다. 10년간 400억원을 지원하는 장기지원은 외국학자들도 부러워 한다. 10년이 지난 뒤에는 대학이 HK교수의 급여를 책임져야 하는 것도 HK사업만이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HK교수의 신분을 보장해 일생동안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사업을 설계한 것은 인문학 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파격적 배려였다.

이렇게 시작된 HK사업은 시작할 때 내걸었던 장기 기획연구, 기초연구, 토대연구 측면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 인문학의 부실한 토대를 재구축함으로써 본격적 연구의 가능성 혹은 새로운 시야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외 지역학 분야의 경우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하고 확장하고 있다. 안정적 연구기반이 장기적으로 주어지면서 한 분야에 집중된 연구 성과가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인문학 각 분야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새롭게 등장해 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대학 부설 연구소가 실질적인 연구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HK연구소 지역별 분포

10년 사업의 절반을 갓 넘긴 HK사업은 처음 내세웠던 취지대로 순항하고 있는 것일까. 최재목 영남대 교수는 “자료 축적이나 인력 양성, 지식의 제도화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성공한 면이 있다”고 일단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기존의 지식들을 축적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개인이 할 수 없는 작업들, 단기간에 할 수 없는 작업들을 힘을 합쳐 장기간 투자해서 지식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분류하고, 그러면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명무실했던 연구소가 연구공간으로 탈바꿈

질문을 바꿔보자. HK사업은 성공할 것인가. 안타깝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업 기획단계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초기 사업 선정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어젠다였다. 새로운 어젠다, 기존의 학문적 테두리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어젠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데도 기존의 제도적 틀 안에서는 잘 창출되지 않았던 어젠다 등을 중심으로 2007년 11월 30개 연구소가 선정됐다. 이에 대해 한 지방 사립대 HK교수는 “초기에는 어젠다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중심으로 선정했고, 대부분의 사업단은 그런 측면에서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메이저 대학 중심의 선정 경향이 강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들이 지방 사업단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HK연구소가 너무 많다는 지적에는 HK사업을 만들 당시 학술진흥재단(현 연구재단) 인문학단장을 맡았던 조성택 고려대 교수도 동의한다. 2006~2007년 당시 대학 부설 인문학연구소는 전국적으로 800여개. ‘이름만 연구소’(조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캠핑족’연구소)가 대부분이었다. 자체 예산과 연구 인력을 갖춘 ‘자립농장형’ 연구소는 5~6개 정도에 불과했다. 20~30개의 연구소는 나름대로 소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거나 수행할 수 있는 ‘텃밭형’ 연구소였다.

HK사업은 ‘텃밭형’과 ‘자립농장형’ 연구소를 대상으로 했다. 10년 장기지원을 통해 ‘텃밭형’은 ‘자립농장형’으로, ‘자립농장형’은 ‘세계적 연구소’로 성장시킨다는 게 처음 구상이었다. 20~30개 연구소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2013년 현재 HK연구소는 인문분야 27개, 해외지역분야 16개 등 43개다. 조 교수는 “신규 선정은 2007년, 2008년에 끝내고 이후에는 관리에 들어갔어야 했다. 잘 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연구소를 집중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는데 과제 중심의 프로젝트성 사업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HK사업이 꼭 성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최재목 교수는 “지난 5년이 시행착오의 기간이라면 앞으로 5년은 모색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5년이 지났으면 평가해서 계속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아니면 탈락시켜야 한다. 또 깊게 할 것은 깊게 하고, 여러 대학을 묶어 컨소시엄을 한다든지 묶을 수 있는 것은 묶어주면서 광역화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조성택 교수는 “과거 BK21사업처럼 상설 관리위원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한 지방 사립대 HK교수는 “1, 2차 선정된 HK연구소들은 지역 인문학의 지속 가능성과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인문학의 지나친 수도권 집중화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역 사업단의 지속성을 보완할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HK사업은 인문학의 기초적 연구, 토대 구축, 다양한 실험적 연구가 가능하도록 장기적 전망 아래 기획된 사업이다. 그런데 사업 취지와는 달리 단기 성과를 독촉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는 “대학본부에서 연구실적을 과다하게 요구하는 면이 있다. 3년씩 단계를 나눠 평가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2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연구업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도 있다. 지금 상황으로는 10년 정도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식의 연구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과도한 연구실적 요구가 HK사업 본래 취지 흐려

<교수신문>이 ‘인문학,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라는 시리즈를 진행하며 만났던 HK연구소 소장과 전임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는 신분의 불안정성이다. 수도권 사립대 HK교수로 있다가 다른 대학의 학과 전임교수로 자리를 옮긴 교수는 “정부에서 10년을 보장하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솔직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진태원 HK교수는 “과연 10년 뒤에도 이 자리가 유지될까 회의가 크다는 게 자리를 옮기는 가장 큰 이유다. 10년 뒤에도 자리가 유지되고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면 이 자리로 옮기는 학과 교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HK교수가 한 급 아래라는 인식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교수의 말처럼 제도적 안정성 문제는 교수사회가 HK교수를 여전히 ‘半교수’, ‘이등시민’으로 취급하는 풍토와도 연결된다. HK사업의 핵심인, 대학연구소에서 연구에만 전념하는 새로운 교수직에 대해 기존 학과 교수들의 반감과 반발이 적지 않다. 승진과 정년보장 심사에서 HK교수에게 더 많은 연구 실적을 요구하기도 한다. 조성택 교수는 “HK교수가 열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딱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사회의 문화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제도개혁만으로는 개선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대학 내 구성원이나 대학 당국은 인문학 관련 연구소에 전임교수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회의적이다. 연구소는 학과 교수들이 수행하기 힘든 연구, 즉 연구방법과 관련한 학제 간 연구나 많은 연구인력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공동연구가 가능하다. 학과 교수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학과 교수의 부족한 연구분야를 보충하는 윈윈 관계에 있다. 연구소의 전임교원 확보나 각종 지원은 대학의 연구력 향상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길 바란다.” 김동철 부산대 한민족문화연구소장의 부탁이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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